현 부평삼거리에서 간석오거리에 이르는 원통이고개에는 거대한 운하 건설 역사가 남아있다. 삼남지방에서 세곡을 실은 배가 한강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강화 손돌목에서 침몰하는 일이 잦았다.
고려 고종 때 최충헌 아들 최이(崔怡)가 운하를 뚫어 조운로로 이용하고자 구상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조선 중종 때 권신 김안로는 부평벌을 가로질러 한강과 인천 앞바다를 잇는 뱃길 운하 공사를 시도하였다.
인천 북항쪽과 인천교의 ‘번지기'(番作里)를 거쳐 옛 주안염전으로 하여 간석오거리에 이르는 운하였다.
그러나 이곳 원통현(元通峴)에서 거대한 암반에 막혀 실패하고 말았는데 온갖 고생이 허사가 되어 원통하다고 ‘원통이고개’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전해온다.
조선 새 도읍지를 정하는 과정에서 여러 곳에 역사적 의미를 내포한 설화가 남아있는데 그중에 ‘원통이고개’ 도 있다.
공주, 한양과 함께 도읍 후보지 중 하나였던 부평을 물색하던 무학대사(無學大師)는 벌판이 넓고, 골짜기가 백개라는 조건에도 꼭 맞아서 태조 이성계와 다시 부평을 찾는다. 그런데 아무리 세어 봐도 골짜기는 아흔아홉밖에 안 되었다. 구름에 가려있던 한 곳이 언덕으로 변해 있던 탓이었다.
이는 하늘의 뜻이라 여겨 도읍을 포기하면서 ‘원통한지고’라 하여서 그리 부르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지금 원통이고개는 경인철도와 나란히 지나가는 경인로 상에 놓여 있지만, 19세기 말에 그려진 부평군읍지에는 경인로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다만 주요 길목으로 십정동을 지나는 정항현(井項峴)과 인천도호부로 가는 성현(星峴)만이 지도에 나타나고 있다.
경인로는 인천이 개항이 되면서 1883년(고종20년) 폭2m인 도로가 개통되었고, 1914년에 대대적인 확장공사를 하였다.
경인철도가 놓이기 이전에는 제물포에서 서울로 가는 길은 해로와 육로가 있었다. 해로는 제물포에서 강화도 염하를 지나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용산에 이르는 길이다. 주로 화물 운반을 주로 하였으나 한강물이 얕고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여 8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그나마 12월 중순에서 3월 중순의 결빙기에는 통행할 수 없었다.
육로는 말, 마차, 가마 등이 통행할 수 있었으나 제물포에서 영등포, 양화진(철곶포), 마포를 거쳐 서울로 들어가는 경로는 12시간 이상이 걸렸다. 원활한 수송을 위해 일본인이 경인마차운수사업을 시도했으나 마필이 부적당하고 비용이 많이 들어 포기한 일이 있었다.
반면 청국 주재관 위안스카이(袁世凱)는 울퉁불퉁한 도로에 적합한 만주산 마필을 투입하여 청일전쟁 전까지 경인마차운수사업에서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고 한다. 인천에서 서울까지 6시간에 주파하여 절반으로 시간을 단축하였다.
이후 경인철도가 1899년 9월 18일 인천~노량진 간 약 33.8Km 구간을 개통하여 1시간 40분이 걸렸다. (부평사 일부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