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2016년 3/4) 시각리뷰에 부평역사박물관 특별 기획전을 둘러보고 쓴 글을 다시 올립니다.
글쓴이: 이장열 (0123456789연구소)
–부평역사박물관 ‘신촌 다시보기’ 특별기획전을 둘러보고
부평 신촌의 출발점은 무엇인가? 사뭇 궁금해진다. ‘신촌 다시보기’ 특별기획전이 펼쳐진 입구 앞에 벽처럼 마주선 그곳에는 흑백 사진 속 꽃다운 여성들이 수줍은 듯 포즈를 취한 채 사진기 앞을 응시하고 있다. 주말의 휴일을 즐기기 위해 부평역사박물관을 찾은 관람객들은 그 여성들이 누구인지 궁금했지만 어떤 설명도 그곳에는 없다. 부평 신촌의 풍경 속 사람들인 줄 착각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미군용 깡통을 옆에 둔 채 두 여인이 포드를 취한 그곳은 어디인가? 그리고 부평 신촌 ‘청파미용실’ 2층 창문 사이로 고개를 내민 두 여인은 무슨 사연으로 카메라를 향해 있는가?
‘신촌 다시보기’ 특별기획전이 우리들에게 던진 질문이자 메시지로 간파되는 것은 저만의 판단은 아닐 것이다.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던, 그리고 사진으로 남기고 싶지 않았던 부끄럽고 수치스럽다고 느끼고 있었던 이런 범주의 것들이 박물관이라는 공적 공간에 전시된 것에는 전시기획자들의 도발성이 아니면 설명하기 힘든 곡절이 존재할 것이다. 그 곡절은 특별기획전이 내민 목표에 와 닿는 것이기에 쉽게 알아차릴 성질의 것은 아닐 것이다.
무엇이 부평 신촌의 기획전시 공간에 첫 입구부터 아무런 설명이 없는 흑백 사진을 전시하는 우(?)를 범했을까 하는 질문 앞에 속수무책으로 놓인 전시기획자의 표정은 어떠할까 궁금해진다. 아마도 엉거주춤한 몸짓과 답변이 이어질 것이다. 그것이 ‘신촌 다시보기’ 전시기획자들의 표정이어야 하고, 몸짓이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한국근대문학사를 전공한 필자의 시선에서 무리는 아닐 것이다.
필자가 ‘신촌 다시보기’ 전시 전체를 둘러보지 않은 채 입구에 전시한 사진 벽에서 그만 멈칫멈칫 걷지 못한 채 우두커니 쳐다보기만 하는가에 대한 이유와 관련, 무언가를 찾기 위한 너스레쯤으로 치부해 주기 바란다. 이번 전시기획가들은 처량한 필자 같은 이를 염두해 두지 않았음은 두 말 할 나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전시장 입구 앞에 버티고 선 사진 여러 장이 붙은 벽에 처량한 필자로 하여금 유독 이곳에서만 시선이 줄곧 머물게 한 이유가 뭘까, 가 ‘신촌 다시보기’ 기획의 안팎에 다가서는 지렛대임을 실토한다. 단적으로 말해 ‘신촌 다시보기’ 전시에서 설명 없는 사진 벽면이 유일하게 이 전시기획자들이 드러내고 싶었던 방향이었음이 필자에게 들킨 격인 것.
곧, 그 이후에 펼쳐진 전시 내용은 아무 설명도 없는 사진 벽을 위해 없어도 될 부차적인 것에 불과함을 ‘신촌 다시보기’ 전시기획자들이 염두에 둔 것이 그만 필자에게 살짝 들킨 것이라고 감히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1960~70년대 부평 신촌의 주인공은 이른바 ‘양공주’였다. 미군을 상대로 몸을 파는 이들이 부평 신촌을 일궈냈다. 양공주라는 범주가 스며든 자리에 부평의 한 마을이 ‘신촌’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셈이다. 이들로 말미암아 부평 신촌은 미군 상대 음악 클럽이 생기고, 그 클럽에 종사하는 악단, 가수, 슈샤이보이, 미장용, 음식점, 구두닦이, 양잠점, 양키시장 등등이 생겨났다. 이렇듯 부평 신촌은 양공주를 중심으로 굴러갔고, 토박이 부평 신촌 사람들이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친 곳이었다는 사실은 특별기획전시실에 마련된 소품 및 자료들 속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이번 전시기획자는 ‘캔디랜드’에서 조심스럽게 이른바 양공주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싶었지만 그런 자료, 이를테면 <전국 양공주 실태 보고서>로는 전시기획자들의 의도를 전달하지 못했다. 이번 전시에서 표면적(공식적)으로 가장 신경을 쓴 부스는 ‘캔디랜드’이었지만 양공주들의 고달픈 삶을 드러내는 데에는 미치지 못한 점은 박물관이 갖는 정전 의식에 갇혀 있어야 하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하게 한다.
그래도 박물관의 역할은 여전히 살아 있는 것. 과거의 기록을 발굴한 것을 내어놓는 일. ‘캔디랜드’에서 큰 기록물을 하나를 발견한다. 당시 부평 신촌 근처에 있었던 ‘성원선시오의 집’에서 작성한 <입양아 명부>가 그것이다. 이른바 혼혈아들의 기록이다. 부평 신촌에서 양공주들이 미군을 상대하여 낳은 아이들을 거두어 미국으로 입양 보냈던 명부의 발견과 공개는 인천 부평의 그늘진 역사의 한 장을 공식적인 인천 부평의 역사에 편입시키겠다는 의지에 다름이 아니다.
우리나라 전체 박물관 전시 역사 속에서 양공주의 삶을 다룬 전시는 부평역사박물관이 유일무이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런 전시기획을 한 기획자들의 무모함이 느껴진다. 이런 무모함이 ‘신촌 다시보기’ 특별기획전에서 온전히 묻어남을 알아차린 필자의 입장에서 양공주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는 사진 벽 앞에서 오랫동안 걸음을 옮길 수 없었던 이유인 것이다.
한국의 근현대사를 훑어보면 알 터이지만 역사적 범주에 양공주가 들어설 자리는 전혀 없었고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지금도 주류 역사학계의 정서에는 마찬가지로 양공주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고 해도 무리한 말은 아닐 터. 이런 지점에서 부평역사박물관의 ‘신촌 다시보기’ 전시 기획은 양공주를 지역사적 관점에 뿌리를 두고 역사적 복원을 시도된 무모함이 묻어나는 유일무이한 도전적 시도라는 점에서 그 반향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커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