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비평] 적당한 고독…그리고 물컹함

이상은, 『외로움이 죽어서 물방울이 된 줄 알았다』(현대시학사, 2021)

읽고,  쓰다.

1. 천연스럽게
이즈음 시가 앞으로도 살아남을까? 도발적인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시인이 시를 쓴다는 것 자체가 인류사적으로 일로 평가받을 만큼 문학이 정말이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세기말적 질문에 놓여 있는 이즈음.

“이 뿔의 생이 궁금해
한번 울어 보았다”
– ‘뿔테안경’ 가운데서

고 말하는 이상은 시인을 만났다.

이 시대에 이런 류(流)의 인간(人間)이 존재하나 싶을 정도로 천연스럽게 무덤덤하게 세상이 자기에게만 허락한 시공간을 틈새를 내고 흘려보낸다.

이런 류의 사람이 시를 쓰고, 출판사에서 시집이 나오는 것 자체가 신기하다. 왜 그런가 하면, 뿔테안경을 보고 울었고, 그것도 모자라 들이받는 행위를 자연스럽게 해대는 시인을 발견했기에 신기한 것이다.

2. 적당(的當)하게 물컹하게

‘아프리카 물소가 서쪽으로 지나간
낮은 담장을 따라
마지막 기차가 뱉어 놓은 바다를 따라
바다가 심어 놓은 해당화를 따라
뿔처럼 울어 보았다
실컷 들이받아 보았다
– ’뿔테 안경‘ 가운데서

이 시인에게 시 쓰기가 생을 이어가는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발견하는 것도 예사롭지 않다.

시가 쓰여지지 않는 시대에, 시쓰기를 생(生) 그 자체를 이어가게 하는 감각으로 체화한 시인을 요즘에 우리는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한 며칠 비가 올 것 같다
그래서 난 괜찮다는 스티커 한 장
방문에 걸어두고 비를 맞기로 한다
– ’난 괜찮습니다‘ 가운데서

도심이라는 시공간 속에서 숨어 사는 듯한 시인에게 존재하는 사물 자체가 죄다 사연을 가지고 있음을 간파한다. “현관문에 음식점 스터커가 물뱀자리별처럼 붙어 있”고 “벗어둔 신발을 전단지처럼’ 들이 받아내기에 지독스러운 고독감이 밀려와도 “그래서 난 괜찮다는 스티커 한 장 방문에 걸어두고 비를 맞”는 것이다.

그리고 시인은 뭇 사람들에게 고독감이니 외로움이니 하는 따위는 수사에 불가함을 갈파한다. 뭇 사람들의 시선을 최대한 피하고, 숨죽이며 그따위 수사들을 떨어내는 시인의 시선이 지독할 뿐이다.

거리에는 그들의, 외로움만 남았다
달리는 바퀴는 그들을 빠르게 뱉어내고
그들은 그들끼리 바퀴의 세계에 대해 골몰했다.
– ‘외로움이 죽어서 물방울이 된 줄 알았다’ 가운데서

시인은 외로움이라는 감정 따위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지는 순간,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것임을 일찌감치 간파하고 “달리는 바퀴”에 몰아 넣어 버리고 “이제 조금 다 물컹해지기로 하자”며 “똘똘 뭉쳐 거리를 돌아”다닌다.

시인에게 빈틈 있는 시간이 다가오면 시인은 지독스럽게 그 시간을 쫓아낸다. 쫓아내는 방식이 시인 자신을 더욱 ‘물컹’하게 만들어내는 것인 줄 모르겠다. 시인에게 다가온 ‘단단한’ 시간을 ‘물컹한’ 시간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이 시인만이 구사할 수 있는 시적 구질( 詩的 球質)이다.

나는 내일도 견딜 수 있어요 쓸모 없는 것들을 데리고 밤새 놀았어요 견딜 수 있는 생이 너무 황홀해서 꼭꼭 씹어 먹고 있어요
<중략>
상행과 하행이 포개지며 생겨난 주름살이 반들거렸다 되돌아가는 버스에 오르며 정 힘들면 시골로 내려오라고 했다
-‘쓸모없음’ 가운데서

시인은 “견딜 수 있는 생이 너무 황홀해서” “꼭꼭 씹어 먹”는다. 이 대목에서 울컥한다.
시인은 “포개지면 생겨난 주름살이”로 견딘다.
물컹해지는 시간으로 넘어가는 시쓰기. 시인에게 생을 이어가는 방식을 무슨 곡절이 있어서 발견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여튼 시인은 이 물컹해지는 방식을 발견했기에 계속 이어질 시쓰기가 기대되고 기다려진다.

툭툭
꽃잎 떨어진 공터
결국 여길 지나야 집으로 가지
봄밤 가득한 공터로 가기 위해
집으로 가도 있다
그렇지 공터를 가려면
결국 집으로 가야지
집이 사라지면
벚꽃 떨어진 공터로 사라질 텐데
벚꽃이 지기 전에
서둘러 어디로든 가야겠다

벚꽃이 필 때마다 환한 공터가 생겼다
– ‘집으로 가는 저녁’ 가운데서

참말로 기가 막힌 풍경을 만들어낸다. “신호등이 없는 비스듬히 기울어진 길을 따라 비스듬히 기울어지며 집으로 가”는 시인이 “꽃잎 떨어진 공터”으로 걸어서 지나면 “벚꽃이 필 때마다 환한 공터”가 물컹하게 변화시키는 시적 구질(詩的 球質)을 구축해내는 방식이 한국 시사에서도 보기 드문 장면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절창이다.

그나마 남아있는 간판의 불이
하나씩 꺼져갔다
계단을 향해 사선으로
몸을 던지는 낙엽
그렇게 생을 마감해도 된다고
말리지 않았다
– ‘마감’ 가운데서

“휴일에도 문을 연 문방구를 찾아 계속 걷는” 시인에게 “안개로 가득한 검은 밤”이 앞으로 가로막고 있는 골목길 어딘가 “계단을 향해 사선으로 몸을 던지는 낙엽”을 포착하면서, 시인은 “그렇게 생을 마감해도 된다‘며 세상과 싸우지 않고 한발 물러선다. 그렇게 물컹해지는 것이다. 그것도 사선(斜線)으로 말이다.

집으로 가는 저녁
적당히 차가 밀리고적당히 사람들이 오고가고
적당히 붉어진 하늘
비로소 저녁은 완벽해 보였다.
<중략>
안녕
그랬던 것처럼 적당히 이별을 하고
돌아서는 마음은 붉었다고
신호등이 길을 건너고 있다
수시로 적당하게 집으로 가야 할 것 같다.
-‘적당한 저녁’ 가운데서

사물을 물컹함으로 구축해내는 시인의 남다른 시선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그 실마리는 소소한 일상을 살아가는 것에서 존재한다. 과하지 않고, 감하지 않은 ‘적당한’ 몸가짐과 ‘적당한’ 시선, 그리고 ‘적당한’ 생각, ‘적당한’ 시간, 그리고 ‘적당한’ 살림살이를 유지하기에 물컹함이라는 시적 구질을 독보적으로 구사할 수있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래서 시인은 ‘수시로’ 시간을 적당하게 조율하면서, 삐꿈하게 문을 살짝 열고 세상과 소리 없이 만난 시간을 기록하고 있다. 그것도 물컹하게….

 

3. 이토록 치열한 허기, 그리고 퉁치기

내가 가발을 쓴 것을 단번에 알 수도 있다
다행히도 나는
볼 수 없는 사람이어서
사람들이 안다는 것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매일매일
보이지 않는 일과 볼 수 없는 일을
어느 정도 퉁치는 일에 익숙해져 갔다
-‘청맹과니’ 가운데서

2022년 10월. 시인은 인천 비좁은 상가 골목이나, 낯익은 골목길을 걷고 있을 것이고, 그러면서 시인의 눈으로 들어오는 사물과 풍경에는 쥐구멍만한 지나온 시간들이 쥐구멍만한게 주렁 매달려, 시인의 발걸음을 멈칫멈칫하게 잡아 끌고, 그러면 시인은 잠시나마 찰나지만 시간을 정지시켜버린다.
정지된 시간에서 시인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관계의 선(線)들을 뚱치는 솜씨를 발휘한다. 이 지점이 이 시인만이 누리는 황금의 시간을 만들어내는 독특한 시적 구질로서 자리 매김된다.

시인이 구축한 황금의 시간이 늘상 그렇게 다가올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시인이 또 다른 시적 성취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극복해야 할 경계이다.

이즈음 시대에 시를 쓴다는 것, 시인으로 살아남는다는 것이 그래서 힘겹다. 세상의 시간이 너무나 빠르게 지나가기에 어디가 현재인지 과거였는지, 아니 미래라는 시간은 오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가늠할 수 없는 21세기는 시인으로 살아남기는 더욱 힘겨울 수밖에다.

그러면서도 이 시인이 시쓰기는 멈추지 않지 않은 힘은 슬픔을 천연덕스럽게 퉁치고, 기대고 싶다고 솔직하게 수줍게 말하기에 있다.

눈의 무게가 너무 무겁지 않기를

눈이 내리던 그날 저녁
따뜻했던 기억을 따라다녔다
눈처럼 기울어진 곳으로
기대고 싶었다
-‘눈처럼 기대고 싶다’ 가운데서

시인은 일상의 번잡한 세상을 궁핍하게 쥐구멍만하게 만들어버린다, 그래야 시인으로 살아나갈 수 있기에 “항로를 일탈한 별똥별/드디어 몸을 던”(‘부딪치고 싶은’ 가운데서)지고, “내 손목을 잡아 준/비슷한 마늘빵을/달콤해질 때까지 먹었”(‘무늬를 가진 사람’)수 있는 것이다.

서정(抒情)의 리듬을 느끼게 해 준 시인이다. 시 보기가 쉽지도 않은 시대에 시집을 펼쳐보고, 밑줄도 그어 보고 읽게 한 힘은 우리가 잊고 있었던 서정으로 나아가는 오솔길을 내어주었기에 그렇다.

그 서정은 ‘치열한 허기’(‘밥’)로 세상과 마주한 시인이 우리 시대에 인천에서 살고 있기에 만날 수 있어서, 행운이다. <끝>

@문예비평가 이열(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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