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천(부평올스타빅밴드 단장)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는 독일 출신 유대계 철학자이며 정치이론가이다. 그는「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저서를 통해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1961년 나치 독일의 친위대 장교이며 홀로코스트의 책임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공개재판이 예루살렘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홀로코스트의 생존자였던 한나 아렌트는 재판을 참관하기로 한다.
아돌프 이이히만은 2차 세계대전 중 유대인 600만 명 학살의 실무 총책임자 위치에 있었던 인물이다. 매우 사악한 악마이거나 사이코패스일 거라는 예상을 하였지만 막상 그의 모습은 호리호리했고 동네 아저씨처럼 평범하고 오히려 선량해 보이기까지 했다고 한다.
법정에서 아돌프 아이히만은 자신은 공무원으로서 단순히 명령을 성실히 수행했을 뿐이라며 도의적으로 잘못은 했으나 법적으로는 무죄라고 항변하였다고 한다. (재판 끝에 아돌프 아이히만은 결국 사형선고를 받고 1962년 5월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러한 모습에 한나 아렌트는 충격을 받았고 선하고 평범한 사람도 특별한 의도 없이 악을 행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는 무사유(無思惟)가 얼마나 무섭고 위험한지를 얘기한다.
지난해 말 느닷없는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로 온 나라가 혼란스럽다. 그러면서 우리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접하게 된다. 집권 여당 의원임에도 계엄령 해제 국회 투표에서 찬성 투표한 의원도 있고, 국회의사당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청사 등을 진입 점거하라는 상부의 지시가 있었지만 명령에 복종하지 않은 일부 지휘관과 군인들도 있었다.
만약 이들이 무사유로 용기 있는 판단을 하지 않았거나 단지 상부의 명령이라는 이유로 무책임하게 복종만 했다면 어쩌면 우리는 지금 더욱 혼란스럽고 참혹한 현실을 맞이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고난으로 민주주의를 회복하였지만 우리는 다시금 민주주의 시험대에 올라 있다.
법원 난입사태가 일어나고 일부 극우적 유튜버와 정치인들은 무지한 국민들을 선동하며 자신들이 마치 역사의 정의 편에 서 있다는 맹신을 갖게 만들어 폭력조차도 합리화하고 있다.
어느 시절이든 어느 곳이든 무지(無知), 무능력(無能力), 무사유는 모두 같은 의미로 부정적이며 불행한 결과를 만들어낸다.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악의 평범성’은 우리가 사고를 멈추는 순간 현실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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