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발행인
장맛비가 주적주적 내리는 7월 말이다. 마산에서는 기억해야 할 날이 하나가 있다. 1954년 7월 29일이다. 카프 정통파 권환(본디이름 권경완)이 세상을 등진 날이기 때문이라. 한국 근대문학사에 문학을 운동으로서 접근한 그룹 카프(KAPF: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기술부 책임자, 제국대학 출신으로 맑스주의 철학을 원전 그대로 읽어낸 이가 마산 진전면 오서리 출신 권환이었다.
권환은 몸빠른 카프의 맹장 임화와 달랐다. 임화는 남로당(남조선노동당)으로 달려갔지만, 권환은 1945년 광복 이후 남로당과 북로당(북조선노동당)에도 낑기지 않았다. 이 분석은 작년 10월 25일에 세상 떠난 경남 진영에서 나서 마산동중학교, 마산상고를 다녔던, 권환의 문학 후배 명민한 김윤식이 바라본 권환의 행보였다.
2004년 권환의 유택이 있는 마산 진전면 오서리 보광산에서 바라보이는 경쟁재에서 열린 제1회 권환문학제 기념특집호에 선배 권환을 한국근대문학사에 편입시키는 본격적인 글쓰기를 김윤식은 ‘무작법의 시학-카프시의 전형으로서 권환 시학’으로 발표했다.
권환과 김윤식이 그렇게 한국 근대 문학사의 흐름 속에서 공식적으로 조우하게 된 해가 사실 2014년이라고 보면 될 터. 지역을 오래 동안 떠나 이광수와 임화와 염상섭, 백철 등 문인들에게 집중한 김윤식은 그의 고향권 후배들이 지역문학연구방법론을 두 손에 들고 경남지역의 권환과 향파 이주홍, 정진업 등이 한국근대문학사에 큰 흐름을 형성하고 있음을 실증적으로 접근하는 풍경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였음을 내비취기도 했다. 물론 김윤식은 그것도 글로서 말이다..
권환은 1948년 대한민국정부 단독정부가 수립될 무렵에 고향 마산으로 몸과 마음을 숨긴다. 마산중학교에서 독일어 임시 교사로 일한다. 집안 형님인 권영운 마산중학교 교장의 도움 덕분으로 호구지책은 면할 수 있었다. 젊은 시절부터 앓았던 폐결핵은 권환을 더 이상 문학 활동을 할 수 없게 했다. 1954년 휴전이 끝나고, 장맛비가 남한을 뒤덮고 있을 1954년 7월 29일 마산 완월동 우거에서 지독스럽게 고독하게 생을 마감한다.
1954년 8월 4일 동아일보에 권환의 부음을 알리는 기사가 나왔다.
“시인 권경완(일면 권환)씨는 그동안 숙환으로 신고하던 중 지난 7월 29일 상오 11시 마산시 완월동 4가 15번지 우거에서 별세’ .
한국전쟁으로 임시수도 부산에 동아일보사를 임시로 운영할 때, 당시 주필로 활동한 고재욱은 권환가 동갑내기로 일본 야마가타고등학교와 경도제국대학 동기라는 인연으로 쓸쓸한 죽음을 맞은 권환의 부음 기사가 뒤늦게나마 나온 곡절로 짐작된다.
권환이 장맛비가 내리는 마산 완월동 우거에서 세상을 등질 때, 1930년대 함께 활동한 임화는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 미제간첩단 사건으로 김일성 북한 정부에 의해 문인으로서 세계사적으로 기이하게도 총살형을 당해 영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임화의 무덤도 북한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안하다. 결국 북으로 간 많은 카프 동지들은 흩어지고 사라져 서로의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비극의 시대를 산 세대이다.
권환에게 자식이 없다. 양아들을 두긴 했다. 영민한 문학사가 김윤식도 자식이 없다. 이 지점에서 권환과 김윤식은 공통분모로 고독을 공유했다. 1954년 권환의 부음은 마산에서 고독했다. 2018년 김윤식의 부음 소식에 마산은 너무 조용했다. 그래서 2019년 7월말의 장맛비가 더욱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