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부평5동 부흥로타리에서 북쪽으로 장제로를 따라 굴포천역 못미처 욱일아파트와 대동아파트 인근을 「고니샛말」이라 부르고 있다.
120여 년 전 부평역 일대는 경인철로가 개통되었지만 유독 부평역 만이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외진 벽촌이었다. 진펄의 불모지로 저습지대인 부평시장일대는 갈대만이 무성한 곳이었다. 1934년 처음으로 전기가 들어올 때 까지 벌판섶의 인가라고는 「하촌마을」에 30여 호와 역전에는 5~6호가 있을 뿐 지금의 부평시장에서 북쪽으로는 인가하나 없는 허허벌판으로 논도 밭도 아닌 천수답의 하천 침수 지역이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산미증식계획」 일환으로 1925년에 한강변 일대에 제방을 쌓고 김포 신곡리에 배수갑문을 설치하여 부평수리조합의 설치인가를 받았다. 부평벌에 몽리구역(蒙利區域) 확대를 도모하였으나 그해 을축년 대홍수로 인하여 소작농민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다.
그 무렵 고니시(小西)란 일본사람이 이곳에 와서 보니 땅값이 싸고 농지개량 을 하면 옥답을 만들 수 있기에 십여 정보를 사들이고 지금의 부평중학교 앞 부평동 379번지에 직경 약 50m 저수지를 만들었다.
이 저수지 옆에 고니시(小西)와 더불어 대여섯 집이 모여 살아서 「고니시마을(小西村)」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여름철 천낙수(天落水)에 의존한 저수지로는 농사를 하기에 부족하였다. 이러기를 몇 해 거듭하니 고니시는 자금난이 겹쳐 농사에 실패한다.
그 후 고니시는 한국 여자와 결혼을 하였고 한국말이 유창하여 서민층과 잘 어울려 광복 후에는 이름을 부인의 성(姓)을 따라 박(朴)이라고 하였다. 이 「고니시마을」이 없어진 지 몇 해 후 이곳에서 동쪽 3백미터 지점인 수도길 섶에 빈농들이 집을 짓고 살기 시작하여 몇 해 안가서 마을이 형성되니 이를 역시 「고니시마을」이라 한 것이 「고니샛말」로 변음 되어 불리게 되었다.
2017년 무렵 고니시의 셋째 아들이 죽기 전까지 어릴 적 친구들인 초등학교 동창들을 만나기 위해 1년에 한 번씩 부평을 방문했다.
지금 이름이 신복공원으로 바뀌었지만 작년까지만 해도 고니샘공원으로 불리웠다.
이 마을 뒤 삼산경찰서 인근 저습지에 60정보의 방죽이 있어 일제강점기 때 천일(天日)이란 일본인 소유로 천일농장이라 하고 「신트리」에 창고를 짓고 일본인 미스모리가 상주하여 농장을 관리하고 방죽도 「천일방죽」이라 불러 왔다.
광복 후에도 「고니방죽」이라 불러 왔으니 「고니새말」에 붙어 있는 방죽이란 뜻을 담고 있다. 그러고 1953년 경 최규헌⋅김재신⋅유상목 ⋅원유본 등 이 동네 어른들은 마을의 「고니새말」을 대신 신복동(新福洞) 으로 고쳐 부르게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부개3동의 행정동으로 불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