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류와 온조의 이야기가 있는 성현(星峴)
– 중국으로 가는 사신을 전송하는 이별고개
부평의 금마산(광학산)과 거마산 사이 고개 길로 황굴(日新洞)에서 만수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비루고개(別離峴)”라 불러오고 있는데 모든 옛 지도에는 성현(星峴)으로 표기되고 있다.
이 지역은 일제강점기부터 조병창과 관련이 있는 일본군 주둔지로 광복 후 향토사단인 33사단이 주둔했었고 지금은 17사단과 3군지사가 위치하고 있다. 항동천의 발원지인 번개약수터와 백조약수터가 있다.
비루고개 옆에는 조선시대 중종 때 김안로가 강화도 손돌목에서 조운선이 자주 침몰하자, 한강-굴포천-구산천-장수천-소래갯골로 운하를 연결하려 하였다. 원통고개와 같이 기반암으로 실패한 “무네미고개(물을 넘기려는 고개)”가 지명으로 남아 있으며, 지금도 남동구 장수동에는 “수현(水峴)마을”이 있다.
이 “비루고개”는 예로부터 한양 서울에서 인천도호부로 통하는 유일한 국도로, 중국으로 가는 사신들이 이 고개를 거쳐 인천 문학산 줄기의 “사모지 고개(三呼峴)”를 넘어서 송도의 능허대(凌虛臺) 동쪽 한나루(大津)에서 배를 타고 중국의 산동반도를 향하여 떠났다고 한다.
사신과 상인을 전송하는 가족과 친지들은 서울에서부터 따라와 “비루고개”에서 이별을 나누고 그래도 정을 못 잊어 헤어지지 못한 사람들은 “사모지 고개”까지 따라와서 멀어져 가는 사신에게 크게 세 번을 불러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고 해서 삼호현(三呼峴)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전한다.
검정색 : 경인철도 (1899.9.18. 인천-노량진간 개통된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
빨강색 : 舊 경인로(1966. 10. 국제마라톤대회에서 맨발의 아베베의 경주가 있었던 곳이었으며, 1971. 8. 23. 실미도 684부대의 사건 이 일어나 서울로 향해 거쳐 가던 도로이다.)
녹색(원형) : 백제 시대부터 개항 전까지 서울에서 인천으로 가려면 부천을 지나 성현(일신동)을 거쳐 여러 고개를 넘어 문학산 밑 인천도 호부까지 왔다. 고개를 넘는 게 최단 거리였다. 영취락이라고 고개 밑에 집성촌 주막에서 일정한 수의 사람들이 모여야 출발했다. 배를 타기 위해서는 다시 또 고개를 넘어 한진나루(능허대)까지 가야 했다.
* 舊 경인로는 개항이 되면서 1883년 폭2m인 도로가 개통되었고, 1913년에 대대적인 확장 공사를 하였다. 동수역에서 성모병원과 인천부개초등학교를 지나 부천으로 연결되는 동수로를 舊 경인로라 한다. 이전의 경인로의 원형은 철곶포-고음달내현(신월동)-성곡(여월동)-당아리고개-조종리(조마루,원미1동)-부천역서쪽1Km(46번국도)-송내촌(솔안말)-중앙 병원-성현-승기리-인천(관교동)-남동경찰서-제물진-영종포진 -도표 설명
그러나 부평의 별리현(別離峴)은 모든 옛 지도를 살펴봐도 찾을 수 없는 지명인데 다만 「대동여지도」에 성현(星峴)이라고 적혀 있어 눈길을 끌게 한다.
또한 1918년 조선총독부에서 제작한 5만분지 1 지형도에는 “성현”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부천군 부내면 항동리에서 남동면 만수리 새골(鳥谷)로 넘어가는 해발 120m 정도의 얕은 고개로 나와 있다.
이곳을 현재의 지도에는 “비루고개”로 표시되어 있으니 별리고개(別離峴)와 통하는 땅이름이고 “별리고개”를 한문으로 표기할 때 배곶이(船串)를 배나무꽃(梨花)으로 했듯이 “별리고개”가 「별고개」로 착각해서 「성현」으로 표기한 것으로 보여진다.
또, 일설에는 비류(沸流)가 미추홀에 비류국을 세울 때 이 고개를 넘었다 하여 「비류고개」라 한 것이 변하여 “비류고개”가 되었다고 전하기도 한다.
남동구에서는 매년 “비류, 문학산 내일을 품다”와 “미추홀 백제신화”등 축제를 하고 있으며, 인천지역의 신화적⋅역사적인 이론적 구축을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고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