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우!”
지난 3월 26일 미국 샌디에이고 맨체스터 그랜드 하얏트 호텔에서 열린 ‘제31회 국제 보조공학 장애인 컨퍼런스’에 ‘살아 있는 팝의 전설’ 스티비 원더가 등장했다. 그 자리에 있던 세계 최초 시각 장애인용 스마트워치 ‘닷워치’(Dot Watch)의 시제품을 체험한 뒤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어렸을 때 ‘미숙아 망막증’으로 시력을 잃은 스티비 원더는 “하루빨리 받아보고 싶다”는 말과 함께 이날 바로 ‘닷’의 스마트워치를 사전 예약 주문했다.
팝의 전설을 흥분시킨 제품, ‘닷워치’는 1990년생 동갑내기 한국 대학생 세 명이 의기투합해 지난해 4월 처음으로 시제품을 출시한 세계 최초의 시각장애인용 점자 스마트워치다. 출시 전 이미 ‘아이디어’만으로 국내외 각종 창업 경진 대회를 휩쓸었고, 시제품이 나온 뒤엔 국내 언론은 물론 미국 타임(TIME)지, 영국 BBC 등 유수의 글로벌 매체로부터도 극찬을 받았다.
‘닷워치’ 제작·판매업체 ‘닷’(Dot)의 김주윤(27∙사진) 대표는 지난 2013년말 미국 시애틀에서의 유학생활 당시 외로움을 달래려 찾아갔던 한 교회에서 사업의 첫 영감을 얻었다. “한 시각장애인 친구가 목에 항상 커다란 기계를 걸고 다니는 걸 봤어요. 너무 궁금해 어느 날 물어보니 ‘점자 정보 단말기’라고 하더군요.”
(‘3전 4기’의 도전 끝에 ‘선한 가치’와 ‘경제적 부’를 동시에 거머쥔 김주윤 대표의 이야기가 궁금하시다면 아래 기사를 참조)
세계 최초 시각장애인용 스마트워치 만든 ‘닷’ 김주윤 대표 인터뷰 | 세계적 아티스트 ‘스티비 원더’와 ‘안드레아 보첼리’를 열광시킨 정보기술(IT) 기기. 시제품으로만 350억원 어치의 사전 판매고를 올린 상품. 세계 최초의 시각장애인용 스마트워치 ‘닷워치’(Dot Watch)를 설명할 때 붙는 수식어들이다. 올해 크리스마스로 예정된 정식 출시에 앞서 이미 국내외 언론 500여 곳의 극찬을 이끌어낸 화제의 IT 기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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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자 정보 단말기’는 컴퓨터 속 문자를 점자와 음성으로 변환해주는 일종의 ‘점자 노트북’이다. 시각장애인이 문서 작성이나 인터넷 검색 등을 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장치이지만 보급률은 2%에 불과하다. 대다수가 가로 40cm, 세로 20cm 내외의 철제 제품으로 무게 2~3kg에 달해 휴대하기 어렵고, 가장 저렴한 것도 300만원이 넘는 고가이기 때문이다.
날렵하고 세련된 정보기술(IT) 기기가 하루가 멀다 하고 등장하는 시대에 목에 건 2kg짜리 철제 단말기라니. 김 대표는 친구와 이야기를 나눌수록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관련 자료를 찾아보니 점자 정보 단말기 시장은 지난 15년 동안 거의 변화가 없었더군요. ‘장애 관련 사업은 시장이 작다’는 이유로 기업들이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은 것이죠. 소수 업체가 독점하는 시장이니 발전도 없는 것이고요.”
유학 당시 ‘창업’을 꿈꾸며 ‘기업가 정신’을 부전공으로 배운 김 대표. 한 외신 기사를 접한 것을 계기로 장애 관련 시장에 뛰어들기로 결심했다. “‘왜 시각장애인들은 디지털화의 혜택을 받지 못할까’란 제목의 기사였는데, 그 기사의 결론이 ‘장애 관련 시장이 작기 때문’이라는 거였어요. 영국 기사였는데, 영국엔 시각 장애인이 50만명 밖에 없으니 시장성이 없다는 것이죠. 그런데 전 반대로 봤어요. 전 세계적으로 따지면 그 숫자가 더 많아질 테니 절대 작은 시장은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죠.”
전세계의 시각장애인 수는 2억8,500만명에 달한다. 수십 년간 정체 상태인 기존 제품보다 더 나은 것을 만들 수 있다면 충분히 도전해볼 만한 시장 규모였다. 결심을 굳힌 김 대표는 미국 학교에 휴학계를 내고 지난 2014년 6월 한국에 돌아왔다. 같은해 9월 동갑내기 친구 성기광 최고기술경영자(CTO)와 주재성 디자이너를 창업 동지로 영입한 뒤 본격적인 제품 개발에 들어갔다.
김 대표의 주전공은 역사학. 부전공으로 컴퓨터공학을 공부했고 엔지니어 출신인 성기광 CTO도 영입했지만 이 사업을 하려면 관련 기술을 잘 아는 ‘잔뼈 굵은’ 진짜 전문가가 필요했다. 마침 자석 분야 기술자로 20년 가까이 일해온 김 대표의 아버지가 전문 엔지니어들을 소개해줬다. 아버지 자신도 기술 고문으로 ‘닷’에 참여했다.
7개월의 연구 끝에 ‘닷’은 자석 기술을 활용한 시각장애인용 스마트워치 ‘닷워치’를 개발했다. 모양새는 일반 스마트워치와 똑같지만 액정화면이 있을 자리에 24개의 점자핀이 놓여 있다. 블루투스를 통해 스마트폰과 연동하면 이 핀들이 위아래로 움직여 휴대전화로 들어온 메시지를 점자로 변환시켜준다. 기본적인 시계 기능과 음성 녹음은 스마트폰의 연동 없이도 가능하다.
‘닷워치’는 기존 점자 정보 단말기와 비교해서도 성능과 가격 면에도 모두 우위라는 평가를 받는다. 기존 점자 정보 단말기는 전기 자극에 세라믹 판이 구부러지는 원리를 이용한 것으로, 세라믹 판 길이가 일정 수준 이상이 돼야만 점자를 표시할 수 있어 소형화가 어려웠다. 원재료가 되는 세라믹 가격이 비싼 것도 대중화의 걸림돌이 됐다. 반면 ‘닷워치’는 세라믹 판 대신 자석 위에 코일을 감아 전기 신호에 따라 점자핀을 움직이는 방식으로 제품 소형화와 가격 절감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었다. 이러한 기술 혁신 덕에 크기는 기존 점자 정보 단말기의 20분의 1로 줄였고, 가격은 10분의 1수준(290달러)으로 낮출 수 있었다. 한국어와 영어, 두 언어를 점자 지원한다.
디자인에도 신경을 썼다. ‘쓰는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으니 디자인은 중요하지 않을 것’이란 선입견과 달리 시장 조사 과정에서 만나본 시각장애인들이 하나같이 ‘시계의 모양과 색’을 궁금해했다고 한다. “비장애인도 함께 착용할 수 있는 제품”을 고민한 끝에 현재의 원형 시계 디자인이 나왔고, 지난 2월엔 세계 3대 디자인 어워드로 손꼽히는 ‘독일 iF 디자인 어워드’ 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오는 12월 정식 출시를 앞둔 ‘닷워치’는 ‘장애 분야는 시장 규모가 작아 성공하기 어렵다’는 세간의 우려를 불식시키며 선주문으로만 벌써 13만대를 팔았다. 약 350억원 규모다. 이탈리아 출신 유명 시각장애인 테너 안드레아 보첼리도 사전 주문에 동참했을 정도로 이미 관련 시장에선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다.
세계 최초 시각장애인용 스마트워치를 성공시킨 ‘닷’의 목표는 점자를 더 널리 알리는 것. 국내 약 30만명의 시각장애인 중 점자를 해독할 수 있는 비율은 5.1%에 불과하다. 시각장애인의 89.4%가 후천적인 질병이나 사고로 갑작스럽게 시력을 잃기 때문에 아예 점자 학습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더욱이 점자로 읽을 수 있는 콘텐츠가 전체 신간 도서 대비 3%가 채 안 돼 점자 활용도가 극히 떨어진다는 점도 문제다. ‘닷’은 현재 카이스트 권동수 기계공학과 교수팀과 협업해 시각장애인이 혼자서도 점자를 학습할 수 있는 점자 태블릿 PC ‘닷패드’를 연구·개발 중이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기술벤처 지원 프로그램 ‘CTS’(Creative Technology Solution)의 일환으로 아프리카 등 개발도상국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저가형 스마트워치 ‘닷미니’도 개발하고 있다고 닷 측은 밝혔다.
“우리나라의 경우 정부가 매년 2,000대 정도의 점자 정보 단말기를 구입해 시각장애인에게 지원하고 있는데, 7년 동안 7번 신청해서 모두 떨어진 분도 계시더라고요. 그만큼 보급률이 떨어지는 셈이죠. 글씨를 읽지 못하면 공부도 못하고 취직도 하기 힘들잖아요.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일 수 있는데, ‘시장이 작다’고 외면하고 있으면 안 되죠. 전 내일 당장 죽는다고 해도 마지막까지 이 일을 할거에요.” 김 대표가 이 시장에 ‘승부수’를 던진 이유다. /조가연, 백상진 기자 gyjo@bzup.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