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진의 옛이야기] 내가 겪은 인천상륙작전-전북 완주에 사는 한 농민 이야기

살아남은 이들의 슬픔.전쟁으로 목숨 잃은 이들의 슬픔이다.

이성진 인천골목길문화지킴이 대표

 

지난 8월 중순 더위가 한창 일 때 사촌모임으로 전북완주에 갔다. 계곡물도 많이 줄었을 뿐만 아니라 미지근했다. 새벽에 일어나 산책하려고 계곡에 나갔다. 혼자 둑방에 걸터 앉아 있는데 노인 한 분이 건너편 논을 보려고 오시는 것이었다. 일어나서

“안녕하세요?” 인사했더니

“어디서 오셨슈?”

“인천에서 왔습니다.”

“인천이 내 고향인데?”

“어디서 사셨어요?”

“내가 신화수리라고 했는데?”

“예 화수동이라고 해요”

“뭐 하시는 분이유?”

“학교에 있어요.”

“그래요. 내가 고향 떠난 지도 60년이 훨씬 넘어서 고향이 고향같지 않아. 너무 어릴 때 떠나서”

“신화수리 어디서 사셨어요.”

“아버지가 조선철도공작창에 다녀서 공장 근처에 살았어”

“철도공작창은 지금 대전으로 이전했고요. 아파트가 되었어요”

“아파트, 그렇게 되었어?”

이렇게 얘기를 나누면서 노인의 살아온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대략 이렇다.

1941년 생으로 인천 신화수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철도공작창에서 일하였고, 어머니는 여성단체에서 일을 하였다고 한다. 해방이 되고 아버지는 다니던 어느날 철도공작창에서 쫒겨 났고, 어머니는 여성동맹으로 기억하는데 나중에 들은 얘기라서 확인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아버지는 좌익측 노동조합에서 있다가 쫒겨난 것이었다.

경찰이 자주 집으로 와서 아버지를 찾아 데리고 갔고, 한참 있다가 집에 돌아오시곤 하였다고 한다. 15세가 된 큰형, 12세 누나, 10세 자신, 8세 남동생, 6세 막내 여동생이 있었다고 한다. 형은 인천중학을 다니고 있었고, 누나, 자신, 동생은 송현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막내여동생은 유치원을 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가 철도공작창에서 쫒겨 난 후에는 막내여동생은 유치원을 그만 둘 정도로 가정형편이 어려웠다고 한다.

밤에 누군가 집으로 돌멩이를 던져 놀라 잠을 깬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고, 밤이 되면 남매가 꼭 껴안고 잠을 자야만 안심이 되었다고 한다.

1950년 한국전쟁이 벌어지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함께 출타하신 후 집에는 오시지 않았다고 한다. 급하게 두 분이 서둘러 집을 나가셨는데 그게 마지막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후에 이웃어른한테 들은 애기인데, 인민군이 들어온다고 환영식같은 것을 한다고 인천시청에서 모여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경찰과 군인이 들여닥쳐 환영식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무차별하게 죽이고 일부는 어디로 끌고 갔다고 하는데 거기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었다고 한다.

실제 7월이 되면서 만석동 해변으로 팔 다리가 묶인 시체들이 떠 내려와 구데기가 하얗게 싸여 있었고, 악취가 무척 심했다고 한다. 인민군들이 와서 이승만괴뢰도당에게 희생된 애국동지라고 하면서 시체를 거두어 트럭에 싣고 갔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거기에 부모님의 시신이 있을 것이었다는 사실을 안 것은 뒤에 알았기 때문에 더 한스럽다고 한다.

8월 인민군 내무서에서 집을 방문하여 쌀 한가마를 주면서 민족해방을 위해 이승만괴뢰도당과 투쟁하다가 희생된 애국동지의 집이라면서 말을 하고 떠났다. 큰형은 이 쌀을 일부만 남겨 놓고 이웃에게 나눠 주었다고 한다. 왜 그렇게 했는지 아직 모르겠다고 한다.

8월 들면서 인천시내에도 미공군 호주기의 폭격이 있어 사람들이 폭격으로 죽거나 다치고 집들이 폭파되는 등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이때 어른들이 폭격으로 무고한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게 했다고 미군욕을 하는 것을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미공군기에 대한 공포심이 컸다고 한다. 내무서에서 준 쌀도 다 떨어지고 배급도 끊기면서 굶는 날이 많았다고 한다. 인민군 점령 초기에 화수동 청년들이 인민의용군 지원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러나 8월이 되면서는 인민의용군으로 강제 입대하였다고 한다. 큰형도 입대대상자에 포함되었으나 동생들을 부양하는 관계로 빠졌다고 한다.

대신 큰형은 동생들을 굶주리는 것을 피하기 위해 월미도 방공호 공사에 나가 밤새도록 일하고 부역을 하였다고 한다. 미공군 폭격을 피해 밤에 방공호 파는 일을 밤동안 하고는 쌀 두되를 받아 왔던 것이다. 큰형 덕분에 굶주리지 않았다고 한다.

9월이 되자, 미공군 폭격이 더 많아 있었고, 큰 형은 집 안에 방공호를 파고 미공군 제트기 소리만 들으면 방공호에 들어가 숨도록 하였다. 부엌 바닥을 파서 나무를 대고 비교적 깊게 판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9월 15일 이전에 미공군이 새벽에 월미도를 집중 폭격하여 마을 전체가 피해를 입고 많은 주민들이 죽거나 다쳤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폭격소리와 폭발 불빛을 집에서 들을 수 있었고, 볼 수 있었다고 한다.

9월 15일 새벽부터 대대적인 미군들의 폭격으로 남매들을 큰형이 파 놓은 방공호에 들어가 있었다고 한다. 큰형이 월미도 방공호를 파면서 세심하게 관찰한 까닭에 부엌에 판 방공호는 땅굴이었는데 내려가는 계단이 있을 정도로 깊었다고 한다.

미군들이 만석동을 거쳐 화수동으로 진주해 들어왔고, 낙오 인민군들이 민간복을 입고 민가에 숨어 들었고, 이를 색출하려는 해병대와 경찰들은 청년단들을 동원해 집집마다 뒤지고 다녔다고 한다. 체포되는 순간, 수류탄을 터트려서 희생되는 경우가 많아 일단 홀딱 벗겼고 이를 직접 목격한 바가 있다고 한다.

10월이 되면서 미군을 김포를 거쳐 서울로 진주해 갔고, 경찰과 청년단에서는 인천 전지역을 다니며 부역자를 색출하였다고 한다. 화수동 주민들을 집합시켜서 일일이 확인 절차를 하였는데 한번 지목되면 그대로 부역자로 처리되었다고 한다.

큰형도 부역자 확인 작업에서 동네 한 사람이 “저 아이도 월미도에서 부역을 했어”라고 말하는 바람에 곧장 부역자로 처리되어 버리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포승줄에 묶여 끌려 가는 대열에서 뒤를 돌아 보며 소리를 외치는 큰형의 모습. 그것이 마지막 모습이었다고 한다.

“걱정하지 말고 집에 돌아가 있어. 형은 곧 풀려날 거야! 동생들 잘 보고 있어”

울지도 못하고 그냥 집으로 돌아와 형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웃사람들이 굶주리는 우리 남매의 모습을 보고는 계성원이라는 고아원으로 보내주었다고 한다. 그냥 오갈데 없는 아이들을 모아 놓았던 관계로 환경이 아주 최악이었다. 배고픔을 면할 수 있는 곳이었다.

다시 서림학교로 들어갔는데 정작 학교건물은 미군들이 사용하는 관게로 간장공장 창고에서 공부를 하였다고 한다.

1953년 겨울, 고아원으로 수원에 사는 고모가 찾아왔다고 한다. 오빠 소식이 궁금해서 인천에 왔더니 동네사람들이 고아원으로 갔다는 말을 듣고 온 것이라고 했다. 우리 남매들은 고모를 따라 수원으로 왔고, 작은 형은 고모부따라 철공 일을 했고 자신도 고모부의 소개로 운송회사에 들어가 트럭 조수 생활을 하다가 트럭운전사가 되었다고 한다.

고모로부터 훗날 결혼 하고 나서 들은 애기인데 아버지는 철도공작창 빨갱이 노동조합 일을 했고, 어머니는 역시 그 계통의 여성동맹에서 일을 했다고 한다. 김두한 대한청년단에게 공장에서 쫒겨났다고 한다. 이후 경찰에 붙잡혀 가기도 하고 나중에는 보도연맹에 가입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인민군이 인천에 진주한다는 소식을 듣고 인천시청에 보도연맹원과 좌익계열의 사람들이 모여 인민군 환영준비를 하다가 경찰과 군인의 급습을 받아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죽었고 아버지는 경찰에 붙잡혀 월미도 둑방으로 끌려갔다고 한다.

이후 트럭운전을 하면서 돈을 모아 운송회사를 경영하다가 IMF때 부도가 나서 빈털터리가 되어 처가가 있는 완주에 내려와 농사를 지으면서 노후를 보내고 있다고 한다.

대략 이렇다.

그래서 신상을 좀 알고 싶다고 하니 그냥 거절하시면서 자리를 떴다.

한국전쟁으로 부모와 큰형을 잃은 그는 평생을 살면서 아픔과 슬픔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그분이 영화 ‘인천상륙작전’을 본다면 어떤 마음을 가질까 생각해 본다.

(이성진-인천골목문화지킴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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