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포로 수용소는 인천에 3개가 있었다. 인민군과 중공군 포로들을 월미도와 인천구치소 자리에 있던 인천소년형무소, 그리고 부영공원에 제10반공포로수용소에 산재해 운영됐다.
아시아태평양전쟁기에는 연합군의 폭격 등으로 인천항과 신사(인천여상 자리에 위치)를 보호할 목적으로 미국군, 영국군을 포함한 영연방 연합군 포로들을 인천 중구 신광초등학교 자리에 전쟁포로수용소를 설치했다. 주로 항구도시인 인천, 부산, 흥남과 서울에 연합군 포로수용소가 운영되었으며, 인천 연합군포로수용소 규모가 가장 컸다.
경남 거제를 중심으로 전국 16개소에 포로수용소를 설치했으며, 부평에는 인천상륙작전이 있던 1950년 9월말에 포로수용소가 설치되었다가 중공군 개입으로 미군과 한국군이 밀리자 수용소는 그해 12월에 폐쇄하고 인천항을 통해 지방으로 이송됐다.
1950년 11월 3만2000여명 인민군 포로가 인천형무소에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1951년 이후 전선이 교착상태가 되자 부평에 반공포로수용소를 다시 설치한다.
전쟁피해가 늘어나자 미군과 중공군은 휴전 회담에 들어갔고, 미국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 전에는 휴전 반대의사를 표시한 이승만 정부는 유엔군 포로의 석방을 단독으로 진행해 미국을 압박했다. 1953년 6월 18일 부평과 부산의 포로수용소를 비롯한 전국 8개 포로수용소에서 유엔군과 아무런 협의 없이 반공포로를 석방하였다.
반공포로들이 수용소 탈출을 시도했고, 2만7389명이 수용소를 나왔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61명이 미군 경비병 사격에 목숨을 잃었다. 이중 사망 44명 ‧ 부상 100여명이 부평 제10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하려던 포로들이었다. 부영공원 자리에 있었던 제10반공포로수용소에서 약 1,486명의 송환을 거부하는 반공포로 중 탈출자는 583명이다.
이들 반공포로들은 미 제44공병대 작업을 도와주면서 포로생활을 하였으며, 대부분이 함경도 출신으로 알려 졌다. 부상자는 근처에 있던 121후송병원에서 입원하여 치료를 받고 나머지 포로와 함께 논산으로 이송된다. 아직까지도 이곳에는 이들의 안타까운 죽음을 알리는 표지석이나 안내판이 없는 현실이다.
전국 각지의 포로수용소에서 인천항으로 이동한 후 영등포를 거쳐 판문점에서 1953년 8월 5일부터 9월 6일까지 북한과 중국으로 송환된 포로는 각각 6만9000명과 7만4000명에 달했고, 1954년 1월 15일에는 일부 중국반공포로 14,400여명이 부평포로수용소를 거쳐 같은 달 21일 인천항을 통해 전원 대만으로 향했다.
1954년 2월엔 영국 수송선을 타고 중국과 북한의 본국 송환을 거부하고 제3국으로 가기를 원하는 전쟁포로 88명이 인도를 거쳐 브라질까지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