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地名)은 본래 오랜 역사와 함께 우리말로 이루어져 있었다. 산, 골짜기, 하천, 여울, 들, 우물, 나무, 돌, 전설 등 지형지물(地形地物)의 생김새와 물체에 따라 땅 이름이 지어지고 역사의 변천에 따라 바뀌어 왔다. 여기에는 우리 조상들의 살아온 지난날의 생활상을 담은 모습과 지역 정체성이 오롯이 담겨져 있다.
땅이름이 바뀐 이유는 역사적 사건, 문화의 변천, 행정지역 변천, 두 음절로 변화, 오기(誤記)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삼국통일 이후 중국식 한자화(漢字化)와 일제 침략으로 일본식 표현이 아직 곳곳에 남아 있다. 우리 땅에 우리말로 된 이름이 있음에도 아직도 원상회복이 안 되고 있다.
지금의 인천광역시에는 ‘읍내(邑內)’가 셋이 있었으니 ‘부평읍내’, ‘인천읍내’, ‘강화읍내’로 그 고을 중심지로 가장 번화하고 발전된 곳이었다.
옛 부⋅목⋅군⋅현(府⋅牧⋅郡⋅縣)시대의 행정명칭을 부내면(府內面)이라 불렀으며, 지금의 계산동을 ‘읍내’라 했다. 1894년(고종31년) 지방제도의 개혁으로 전국을 23부(府) 331군(郡)으로 고쳐 인천군은 부(府)가 되고, 부평은 도호부가 없어지고 부평군이 되었다. 불과 15개월 만에 또 지방제도를 고쳐 조선 태종 13년에 실시한 8도제를 폐지하고 13도 1목 7부 331군으로 다시 고쳤다.
이때 관청 소재지가 있던 ‘부내면’ 모두 ‘군내면(郡內面)’으로 바뀌어 ‘부평읍내’도 ‘부평군 군내면’이 되었다. 또한 일제강점기인 1914년 3월 1일 지방제도의 대개혁을 단행하여 부⋅군⋅읍⋅면(府⋅郡⋅邑⋅面)을 폐합하여 ‘부평의 부(富)’자와 ‘인천의 천(川)’자를 합쳐 새로이 부천군(富川郡)을 신설하였다.
그리고 군내면⋅서면⋅마장면⋅동소정면을 합병하여 부내면(富內面)을 신설하여 ‘부천군 부내면’이 되었다. 부평도호부가 생긴지 481년 만에, 계산동의 부평읍내도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를 배곶이(梨花洞)에서 옮겨온 지 749년 만에 구읍(舊邑)되어 부천군의 부내면 소재지가 되었다.
1914년부터 1945년까지 약 31년간 부평이란 읍호도 사라지는 시기였다.
인천군 읍내로 되어있던 ‘문학’도 새로운 부천군이 와서 읍내 명맥을 이어가더니 ‘부천군청’이 율목동으로 이전되어 ‘인천읍내’도 구읍(舊邑)이 되어 ‘문학면’이 되었다. 강화읍 만이 그대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읍(邑)은 지방자치단체인 군(郡) 관할 아래에 있는 행정구역으로 대부분 도시 형태를 갖추고 인구 2만 명 이상인 곳으로 규정하고 있다. 2017년 현재 전국적으로 총 224 개 읍이 설치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면(面)⋅사(社)⋅방(坊)⋅부(部)⋅곡(曲)으로 쓰이던 명칭이 일제강점기에 들어와서 명칭이 면(面)으로 통일되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1949년에 「지방자치법」이 시행되면서 이러한 읍, 면이 시(市)와 함께 기초적 지방단체로 되었다. 이것이 읍⋅면 자치시대의 개막이었다.
다음에는 옛 부평 각 지명 유래를 연재하겠습니다. (부평문화원 자료 일부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