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부평구 삼산동 농수산물시장 인근에 도항꼬지(道航串)가 있었다. 1923년 이전에 농선(農船)이 굴포천과 한강을 통해 서울 마포까지 운행하였다.
부평⋅김포지역에서 농민들은 농선을 이용하여 밀물 때는 수확물을 서울 소비 시장으로 수송하고 썰물 때는 도성에서 수거한 분뇨를 채소밭까지 운반할 수 있었다. 재래식 거름의 대표적 재료인 똥오줌은 한강을 통해 서울에 채소 따위를 싣고 와서 부려놓고는 서울의 분뇨를 실어 채마밭에 나르는 농선(農船)이 부평, 김포, 일산, 양평 등지까지 다녔다. 1960년대까지도 난지도 일대는 농막과 분뇨 저장고들이 분포했었다.
한강을 통한 강운(江運)을 통한 품목별 지역별 강상(江商)들은 별도로 추후 다루겠다.
농선이 다니던 곳으로 정박지가 있어 도항꼬지(道航串)라 하였다. 경인고속도로 너머 서운동을 ‘도두머리(道頭里)’라 불렀다.
먼동산(망동재)의 줄기가 언덕으로 흘러와서 이 곳에 제법 큰 동산을 이루었으니 머리와 흡사하여 동쪽의 머리로 동두뫼(東頭山)이고 또는 서울로 가는 ‘길머리’가 되므로 도두(道頭)리가 되었다고 보여 진다. 이 지역은 육로나 강운이 시작되는 길섶이라 보면 된다.
지금 계양구 이화동(梨花洞)을 배꽂이⋅배꼬지 등으로 불리는 것은 배곶(船串)이 꼬쟁이 같은 지형에 배가 드나들던 곳이란 뜻의 지명으로 한강 지류 ‘천등천’이 상류인 ‘계양천’에 이어진 곳으로 강운(江運)을 이용했던 수주의 읍 소재지였다.
‘도항꼬지’ 원류는 효성동 도둑굴 깊은 골짜기 안에서 발원되어 남쪽으로 흘러 안아지고개를 오른쪽으로 끼고 원적산 암벽을 들이 받고 마제이(청천동) 마을 앞에서 마장뜰을 가로질러 동류하여 삼산동 벌판에서 원통천에 합류된다.
그러나 청천천은 부평수리조합이 형성되는 1923년에 관계개선으로 지금 부평관광호텔 앞으로 곧게 뚫어 서부간선수로에 입류시키고 있다. 83년 이후 2006년 삼산동 도시개발이 되면서 청천천과 연결되어 있는 서부간선수로를 끊고 굴포천과 다시 연결하게 된다.
다산은 6향(도성 내)과 6수(도성 밖 근교)에 각각 과수원과 채소밭을 만들어 도성 안에서 소비되는 과일과 채소 공급 기지로 삼을 것을 권했고, 홍만선은 한양에 아홉 가지 과일을 재배하고, 도성 밖에서는 파· 부추· 마늘· 무· 오이· 호박· 배추· 쑥갓· 상추 등 아홉 가지를 주로 재배하고, 그 밖에 참외· 수박· 시금치· 미나리 등도 파종하도록 권하였다.
이러한 작물들은 파종기와 수확기가 서로 다른 것이 많아 겨울을 제외하면 작물을 바꿔 연중 집약적으로 재배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연암은 도성으로부터 거름을 공급할 수 있는 근교의 농민들은 상품 채소를 생산하여 높은 소득을 올릴 수 있다고 하였다.
퇴비뿐만 아니라 대궐에서는 봉상시, 사역원, 관상감 등에서 교육을 받는 어린아이들이 동변군(童便軍)으로 차출돼 내의원에서 약을 제조하였으며, 똥을 발사하는 무기 ‘분료포’로 만들어 사용하였다고 한다.
1883년에 세워진 경명현의 중심성(衆心城) 누상(樓上)에 적혀있는 부평팔경 구절 중에 ‘대교어화’(大橋漁火 – 한다리의 고기잡이 불빛)가 나오는 것을 보면, 당시에 배를 이용한 고기잡이를 하였으리라 보고 있다. 위치는 현 박촌교 인근이다.
김포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배꼬지(‘이화동’으로 변형-梨花洞)과 황어장터(場基洞), 선주지동(仙住地洞) 등의 지역 명칭에서 보더라도 조그만 어선 또는 농선이 다녔으리라 본다.
본인이 어릴 적 1960~70년대에 실제로 계양대교 아래 수로에서 붕어, 잉어, 장어 등을 잡으러 다녔다. 제법 큰 물고기들이 많이 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