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과 공간은 사회, 경제, 역사, 기술의 산물로 살아 움직이는 도시에 속해 있다. 공기 좋고 물 맑았던 동네는 산업화로 대규모 아파트가 들어서고 인구이동을 강요하고 있다.
일제는 자국 내 부족한 식량을 보충코자 1910~1920년대에는 식민지 조선에 대한 산미증산계획 일환으로 토지조사를 실시하여 조선농민경제의 파탄을 초래하였다. 부평지역 소작농민들 저항과 함께 해외로 많이 이주하게 된다. 1930년대에는 아시아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며 일제는 조선인을 상대로 강제에 의한 국가총동원을 실시하여 많은 사람들을 부평으로 끌어모았다. 그들이 살았던 영단주택, 검정사택, 관동조, 다다구미, 신촌, 삼릉사택, 디젤사택, 갈산사택, 벽돌막사택, 송신소사택 등은 없어지고 1980~1990년대 이후 아파트단지로 형성되어 갔다.
2021년도에 부평이 지속가능한 사회⋅경제⋅문화적 기반 마련을 위한 법정 문화도시로 선정되었습니다.
부평은 문화로 먹고 살아 가야 합니다.
산곡동 근로자 주택(영단주택)은 원적산(元積山) 줄기의 동쪽 구릉지에 위치한다. 부평은 유난히 바닷물이 들락거리던 습지가 많아 대부분 마을은 산록을 따라 형성되었다.
매년 장마철이면 물과 전쟁을 하였던 물의 도시였다.
원적산은 부평도호부 마장면과 석곶면의 경계가 되는 산으로, 경우에 따라 안아지고개 경계와 효성동 북쪽을 천마산(天馬山), 장고개(場末峴, 場峴, 長峴)를 경계로 남쪽을 원통산(圓通山, 元通山)으로 구분하여 부르기도 했지만, 원적산을 일제강점기에는 철마산으로 잘못 부르기도 했지만 2006년 중앙지명위원회 의결에 따라 변경⋅고시되었다.
현재도 세일고등학교와 명신여자고등학교 뒷산을 동네사람들이 철마산, 만월산터널 부개산⋅금마산 옆 산을 철마산, 장수산과 효성동 옆산을 철마산으로 와전되어 잘못 불렀다. 천마산에는 ‘천마와 아기장수’라는 설화도 남아 있다.
산곡동 근로자 주택지 서쪽, 한일초등학교가 위치한 골짜기를 양성골이라고 부른다. 골짜기 모양이 마치 성을 쌓아 놓은 모양이어서 성안골이라고 하였다가 양성골로 바뀌었다고 전한다.
원적산과 맞닿아 있는 원적산길은 과거에 잘못 불려진 ‘철마산 관통 도로’는 서구의 가좌동으로 이어진다. 세일고등학교⋅한일초등학교와 명신여자고등학교 사이를 지나는 고개를 만든다. 미군들의 중장비 도움으로 1969년 10월에 착공해 1972년 당시 비포장으로 처음 개통했다. 도로를 개통하기 이전까지 산을 넘어가는 작은 소로가 있었으며, 버스가 다니던 이 길은 산곡동 – 가좌동 번지기나루터 – 인천교 – 송림동 부처산 – 배다리 – 동인천으로 연결된다.
그동안 경인로(원통이고개)를 이용해 우회해서 이동하던 부평-인천 간의 이동 시간이 대폭 단축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이용되면서 마장면과 석곶면을 이어주던 고개가 몇 개 존재했는데 안아지고개, 장고개, 구르지고개로 우리나라 최초의 천일염전이 있던 주안갯골과 만나게 된다.
장고개는 미군이 사용하던 1950 ~ 1960년대 군사지도에서 보면 좁은길(Narrow road)라 표기되어 있고 석곶면의 10번 도로와 ‘국방로’ 하고 연결된다. 일본 조계지와 당시 인천항에 정박한 큰 배들에게 수돗물을 공급하기 위해 1905년에 일본인 나카지마에 의해 서울-인천 간 수도 설계가 완성됨에 따라 1906년 11월에 배수지 공사에 착수하였으며, 1908년에 송현동에 있는 산 정상(후에 수도국산-水道局山)에 송현배수지 시설이 준공된다.
이후 한강 연안 노량진에 있던 수원지 정수시설이 1910년 10월에 준공되어 그해 12월1일부터 서울-인천 간 수돗물이 일본조계지 중심으로 급수가 시작된다. 500mm 주철관으로 된 수도관이 묻혀 지나가던 곳에 수도관을 관리하기 위한 폭 4m의 길이 생기고, 이 길을 ‘수도국길’ 이라고 하였다. 현재 3보급단 군용철로가 놓여 있는 곳이다.
이 길은 장고개 – DRMO(일제강점기시대에는 일본제20조선주차군 ‘병참’이 있던 곳) – 부평동초 뒤 수도국 펌프장 – 고니샛말 – 약대동으로 연결되었고, 한국전쟁 때는 이 수도국길로 해서 김포공항과 행주대교 앞 한강을 건너, 서울로 진격하던 길 가운데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