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캠프마켓 안에 있는 사령관실이며 앞에 있는 석등은 일본식 양식으로 만들어진 보아서 일제강점기 당시 조병창에 있던 것으로 보인다. 캠프마켓의 미군들의 휴게 및 사무공간으로 본부사무실, 소방서, 미군숙소, 모터풀, PX, 야구장 및 연병장, 체육관, 수영장, 농구장, 연회장, 공연장, 인쇄소, 통신대, 식장 및 카페, 휴게실, 중앙 보일러실, 재무중대 등이 있었다. 자료제공 : 박명식 (2019)

[박명식, 부평지역사 22] 일본육군조병창과 캠프마켓 이야기(프롤로그) – 기억의 흔적

박명식 향토사학자(부평문화원 이사)

부평 한가운데 위치한 미군부대 캠프마켓(Camp Market)에 기억의 흔적을 더듬어 과거와 오늘 그리고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130 여 년 전 캠프마켓 부지와 주변 땅은 민태호와 양자 민영환 소유였다. 을사늑약에 격분한 민영환이 1905년에 자결하자, 민영환의 땅은 우여곡절을 거쳐 친일파 일진회의 회장이며 정미칠적의 한 명인 송병준에게 넘어간다.

역사적 배경을 잠시 살펴보면, 1876년 2월 일본의 군사력을 동원한 강압에 의한 강화도 조약으로 1876년 부산⋅1880년 원산과 1883년 인천 개항은 조선 민중에게는 고난과 격변의 근대사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1894년 6월 청일전쟁, 1895년 10월 을미사변, 1897년 10월 대한제국 건국, 1902년 1월 제1차 영일동맹, 1904년 2월 러일전쟁, 1905년 7월 가쓰라-태프트 밀약, 1905년 8월 제2차 영일동맹, 1905년9월 포츠머스 강화조약, 1905년 11월 을사늑약, 1909~1918년 보호국으로 식민지 수탈을 위한 토지조사업을 시작으로 1910년 8월29일 경술국치(庚戌國恥-國權被奪) 등의 일련의 침탈과정과 1931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의 아시아태평양전쟁에서 따른 근로보국대와 징병을 통한 국가총동원법(1938년) 형성, 전쟁물자의 강탈과 함께 일반인뿐만 아니라 어린학생까지 강제동원(군인, 군속, 노무자, 위안부 등)과 ‘근로가 곧 교육’이라는 ‘학도근로령‘ 법으로 수업을 포기하게 하고 초등학생부터 대학생까지 1년 내내 근로보국대에 동원 할 수 있는 통년동원(通年動員)으로 이어졌다.

그 현장이 부평지역에는 負의 역사(Dark History)인 근대사의 흔적이 수 없이 남아 있으며, 특히 산곡동과 화랑농장 일대에 남아있는 지하호와 조병창 기능공 양성소, 그리고 일본육군조병창이 있다. 일본 열도에 6군데, 만주에 1군데 있던 일본 조병창은 부정적인 기억과 함께 흔적도 없이 지워졌다.

부평 근대문화유산을 통해 더이상 비극적이며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남긴 장소와 사건을 보며,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전쟁과 만행을 기억이며, 후세들의 평화를 위해 용서를 하되 잊지는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21세기를 평화의 세기로 정착‘하고 ’전쟁유적을 만들어내지 않는 시대‘를 위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아직까지 완전 반환이 이루어지지 않은 캠프마켓은 1945년 9월 8일(타 지역보다 주둔이 5~6년이 빠름)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인천항을 통해 미군 제24군단이 상륙하면서 조병창과 인근 적산(敵産)공장에 애스컴시티를 형성하였고, 1950년 애치슨라인과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지금까지 주둔하게 된다.

일제 침략과 동족상잔의 비극에 이은 불안한 긴장 상태가 지속되는 것이 민족이 자기 힘으로 쟁취한 광복이 아닌 주어진 해방일 때 감당해야만 하는 허망함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앞으로 10회에 걸쳐 과거와 현재의 일본육군조병창과 캠프마켓 이야기를 해나갈 예정이다. 이를 계기로 우리 함께 어떤 방식으로 부평의 미래를 만들어 갈 지 고민했으면 한다.

1940년 초경, 일본육군조병창에 있던 조병창 본부 또는 병원으로 쓰였던 건물로 현재는 화재로 가운데 부분이 소실되고 일부분이 숙소 및 편의시설로 사용된다. 자료제공 : 부평역사박물관

 

부영공원에 위치한 일본육군조병창의 지하호 입구 (2020.4.) 2001년도와 2015년경 전후하여 발굴 조사를 한 적이 있다. 캠프마켓과 부평공원 부지에도 발굴 안 된 지하호 6~7개가 존재하는 것으로 구술되고 있다. 자료제공 : 박명식

 

부영공원에 위치한 일본육군조병창의 지하호(방공호) 입구에 비상구가 있으며, 현재 사진 왼쪽에 있는 것과 같은 비상구 2개와 환기구가 확인 되었고 지상으로 올라가는 계단과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으나 지하계단에는 입구까지 물이 차 있었다. 입구에 트럭 바퀴 자국과 컵라면 봉지 등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1970년대 초부터 1980년대 중후반까지 한국군이 사용한 것 같다. 자료제공 : 박명식 (2020.4.)

 

DRMO내에 남아 있는 군용철로이며 3보급단까지 연결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조병창이 만들어지면서 설치된 것으로 보이며, 무기를 만들기 위해 전국에서 공출된 쇠붙이와 강제 동원된 노무자들이 거쳐 간 곳이다. 미군 보충병과 보급물자들도 인천항을 통해 이곳으로 집결되어 전국 각지의 미군부대에 보급이 이루어지던 곳이다. 이곳 주변에는 ‘병참’(일본군 20주차군의 훈련 장소), 1908년 장고개길 따라 송현 배수지까지의 우리나라 최초의 ‘수도국길’, 한국전쟁에 따른 ‘제10반공포로수용소’, ‘121후송병원’과 산곡동 ‘비행장과 헬기장’ 신촌과 산곡동 영단주택 등이 있으며 앞에 보이는 건물은 1974년에 세워진 빵공장이다. 곧 평택으로 이전 할 계획이다. 자료제공 : 박명식 (2019)

 

현 캠프마켓 안에 있는 사령관실이며 앞에 있는 석등은 일본식 양식으로 만들어진 보아서 일제강점기 당시 조병창에 있던 것으로 보인다. 캠프마켓의 미군들의 휴게 및 사무공간으로 본부사무실, 소방서, 미군숙소, 모터풀, PX, 야구장 및 연병장, 체육관, 수영장, 농구장, 연회장, 공연장, 인쇄소, 통신대, 식장 및 카페, 휴게실, 중앙 보일러실, 재무중대 등이 있었다. 자료제공 : 박명식 (2019)

 

산곡동 화랑농장 인근에 있는 일제강점기 조병창에서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지하호 입구이다. 함봉산 일대에서 발견 된 24개와 제3보급단에서 3개의 지하호가 있으며, 아직 알려지지 않은 많은 지하호가 일신동과 금마산 지역에 있다는 구술이
전해지고 있다. 자료제공 : 박명식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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