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평 한가운데 위치한 미군부대 캠프마켓(Camp Market)에 기억의 흔적을 더듬어 과거와 오늘 그리고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130 여 년 전 캠프마켓 부지와 주변 땅은 민태호와 양자 민영환 소유였다. 을사늑약에 격분한 민영환이 1905년에 자결하자, 민영환의 땅은 우여곡절을 거쳐 친일파 일진회의 회장이며 정미칠적의 한 명인 송병준에게 넘어간다.
역사적 배경을 잠시 살펴보면, 1876년 2월 일본의 군사력을 동원한 강압에 의한 강화도 조약으로 1876년 부산⋅1880년 원산과 1883년 인천 개항은 조선 민중에게는 고난과 격변의 근대사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1894년 6월 청일전쟁, 1895년 10월 을미사변, 1897년 10월 대한제국 건국, 1902년 1월 제1차 영일동맹, 1904년 2월 러일전쟁, 1905년 7월 가쓰라-태프트 밀약, 1905년 8월 제2차 영일동맹, 1905년9월 포츠머스 강화조약, 1905년 11월 을사늑약, 1909~1918년 보호국으로 식민지 수탈을 위한 토지조사업을 시작으로 1910년 8월29일 경술국치(庚戌國恥-國權被奪) 등의 일련의 침탈과정과 1931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의 아시아태평양전쟁에서 따른 근로보국대와 징병을 통한 국가총동원법(1938년) 형성, 전쟁물자의 강탈과 함께 일반인뿐만 아니라 어린학생까지 강제동원(군인, 군속, 노무자, 위안부 등)과 ‘근로가 곧 교육’이라는 ‘학도근로령‘ 법으로 수업을 포기하게 하고 초등학생부터 대학생까지 1년 내내 근로보국대에 동원 할 수 있는 통년동원(通年動員)으로 이어졌다.
그 현장이 부평지역에는 負의 역사(Dark History)인 근대사의 흔적이 수 없이 남아 있으며, 특히 산곡동과 화랑농장 일대에 남아있는 지하호와 조병창 기능공 양성소, 그리고 일본육군조병창이 있다. 일본 열도에 6군데, 만주에 1군데 있던 일본 조병창은 부정적인 기억과 함께 흔적도 없이 지워졌다.
부평 근대문화유산을 통해 더이상 비극적이며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남긴 장소와 사건을 보며,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전쟁과 만행을 기억이며, 후세들의 평화를 위해 용서를 하되 잊지는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21세기를 평화의 세기로 정착‘하고 ’전쟁유적을 만들어내지 않는 시대‘를 위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아직까지 완전 반환이 이루어지지 않은 캠프마켓은 1945년 9월 8일(타 지역보다 주둔이 5~6년이 빠름)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인천항을 통해 미군 제24군단이 상륙하면서 조병창과 인근 적산(敵産)공장에 애스컴시티를 형성하였고, 1950년 애치슨라인과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지금까지 주둔하게 된다.
일제 침략과 동족상잔의 비극에 이은 불안한 긴장 상태가 지속되는 것이 민족이 자기 힘으로 쟁취한 광복이 아닌 주어진 해방일 때 감당해야만 하는 허망함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앞으로 10회에 걸쳐 과거와 현재의 일본육군조병창과 캠프마켓 이야기를 해나갈 예정이다. 이를 계기로 우리 함께 어떤 방식으로 부평의 미래를 만들어 갈 지 고민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