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이성진_인천골목문화지킴이 대표
1943년 10월 동양방직 인천공장 직공은 1,080명(남자 130명, 여자 950명)으로 조선인 직공이 전체 95%를 차지하였고, 관리직 직원이 39명으로 전원 일본인이었다. 남자직공에 비해 여자직공이 많은 까닭은 방직공장 특성상 많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당시 방직공장에 대한 인식이 처녀신세 망치는 곳, 폐결핵 걸리는 곳, 공장가면 겉멋만 들고 유흥가로 빠지게 하는 곳이라는 등 매우 부정적인 까닭에 직공모집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전시체제로 전환되면서 군복을 납품하는 군수공장으로 전환되어 회사 자체 채용 직공보다는 강제 동원된 근로보국대원들로 대체되었다. 이러다 보니 공장 직원도 여성직공이 1,000명, 직원이 30명으로 감축되었다.
특히 여성직공은 여성인력이 타 직종의 근로보국대원 등으로 강제 동원되면서 극심한 인력난을 겪었다. 공장조업 자체가 정상화가 어려운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임금수준도 남자직공이 70전, 여자직공이 40전, 가족수당 3원과 임시 수당 일 5전이 지급될 정도로 열악해 졌다.
1945년 8월 15일 오전 정상작업에 들어간 동양방직 인천공장 남녀직공들은 점심시간을 맞아 식당으로 가고자 하는데 일본천왕의 라디오방송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어수선한 분위기였다고 한다. 그러나 뜻밖에 일본천왕의 항복 선언을 듣게 되자,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직접 접하고 보니 조선인 직공이나 일본인 직원이나 모두가 어안벙벙하였다고 한다.
동양방적 인천공장 가동은 즉각 중단되었고 이에 따라 조선인 직공들은 일을 놓고 대부분 각자 집으로 돌아갔고, 일부만 남아 추이를 살폈다고 하였다. 당시 인천의 20여개의 군수공장이 있었는데 동양방적 인천공장처럼 정상 가동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일본인 직원들은 공장으로 나오지 않고 사택에 머물면서 추이를 살펴봐야 했다. 강제 동원된 근로보국대원들이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 버린 까닭에 기숙사는 텅텅 비게 되었고, 일부만 남아 있었다.
대부분 인천지역의 공장은 일본인 직원들이 일본으로 떠나면서 공장이 폐쇄되거나 조업중단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면서 많은 조선인 직공들은 실업자가 되거나 체불노동자가 되어 엄청난 경제적 고통을 겪었다.
동양방적 인천공장 북성동 사택에 머물러 있었던 일본인 직원들은 미군정 지시에 따라 일체의 재산을 가져가지 못한 채 일본으로 돌아갔다. 공장을 떠나지 않고 있었던 조선인 직공들은 동양방적 인천공장 직장위원회를 구성하여 공장에 나와 목화 등 원료 및 생산제품 재고 파악하였다. 다행히 다른 공장처럼 일본인 직원들은 다른 공장과는 달리 공장의 방수기, 방직기 등을 핵심기계나 재고 섬유를 파괴하거나 훼손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