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경 애관극장

[이성진의 인천 근대 골목 풍경-3] 해방, 그날 신포동 풍경

글쓴이: 이성진_인천골목문화지킴이 대표

1948년경 애관극장
1948년경 애관극장

8월 15일 해방이 왔다. 정오 일본 천왕의 무조건 항복이 라디오를 통해 알게 된 일본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일본의 패전은 그동안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조선인의 존재를 의식하면서 공포는 극에 달하였다. 특히 전쟁으로 인해 강제 징집과 징용 그리고 강제공출과 배급으로 피폐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던 조선인들의 일본에 적대적 불만이 그대로 표출시킬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극도의 공포감에 싸여 있었다.

“소화 20년(1945년) 8월 15일의 중대한 방송으로 일본인들은 느닷없이 죽음의 골짜기로 추락하였음을 자각하게 되었다. 그 충격은 사람들로 하여금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만들었고 정치적인 공백은 혼란을 초래하였다.

눈앞의 문제는 일본인과 조선인의 지위가 뒤비뀐 것으로 왠지 조선인들의 습격이나 박해 및 생명 재산의 안전에 대한 두려움만 존재하였다. 그것들을 보호하기 위한 총독부의 지형을 바라고 있었다.” (소곡익차랑: 인천인양지, 황해문화 2001. 봄호)

그러나 조선인들은 저녁 무렵에 경정(경동)사거리와 애관극장 앞에서 집결하여 조선독립만세를 외쳤을 뿐이다.(이원규, 조봉암평전, 한길사, 2014.참고) 그리고 거리에 나와 조선독립만세 시위를 하였던 조선인들은 일본인 거주지인 개항장 안으로 진출하지 않았다.

“팔월 십오일 날 극장(필자주; 필자가 2006년 8월 인터뷰 중 확인한 결과 신포동 동방극장이라고 함)에 가려고 시내에 나가니까 다른 때보다 사람들이 많이 돌아 댕겼지만, 만세를 부르고 그런 일은 없었어.”(김양섭: 박상규 1922년6월30일생, 눈빛.2005.)

8월 16일 저녁 조선인들은 신포동 사거리에 집결하여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기 시작하였다. 당시 일본경찰서에서 가까운 신포동 사거리에서 집회를 한다는 것에 대한 강한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조선인들을 많이 집결시키기 위해 이승만 박사 귀국환영식을 한다는 헛소문이 돌기도 하였다. 그 덕분인지 조선독립만세를 신포동 사거리에서 부르면서 거리행진을 하게 되었다. 이 집회는 인천 개항 이래 조선인들이 거행하는 첫 대규모 집회였다.

조선인 대규모 시위대가 인천부청으로 진출하려고 하자, 인천 헌병이 즉각 출동하여 총칼으로 위협하며 강제해산을 시켰다. 집회를 주도했던 치안자치회의 조선인 청년들도 일본 헌병의 무력진압에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계기가 되어 패망한 일본 헌병이 일제로부터 독립한 조선인들을 총칼로 위협할 뿐만 아니라 폭력을 자행한 것에 대한 항의로 더 많은 조선인들이 신포동 사거리에 매일 집결하여 횃불을 들고 대규모 시위를 진행하였다.

“십육일 날도 저녁을 먹고서 시내로 나갔어. 그때 수염이 허연 영감이 가운데에 서 있고, 그 옆으로 인천건달들이 영감을 에워싸고 있었어. 누군가가 “이승만 박사 환영식에 간다!”고 그러더라고. 그게 다 헛소린데…. 이승만 박사가 배를 타고 올 턱이 없는데, 환영식에 나간다고 해서 저쪽 신포동 쪽으로 넘어갔지. 그 밑에 갔더니 일본 헌병대가 인천경찰서 앞에서 이리로 오더라고. 나는 그 대열에서 중간쯤 서 있었기 때문에 앞으로 갈 수도 없고 이쪽으로 올 수도 없고….
거기 사거리 이쪽 안에 딱 들어갔는데 헌병 놈들이 총에다 칼을 꼽고서 올라가라고 막아. 나는 길가에 붙었는데, 복판에 있던 사람들은 헌병 놈들한테서 여러 명이 얻어맞았어. 헌병 놈들아 복판에서 그거 하는 사람들을 발로 차고 때리고 그러더라고. 나는 가에 붙어서 올라가려고 하는데 이놈의 발이 떨어져야지. 겁이 나서 어떻게 해. 올라가라고 하니 올라갈 수 밖에 없지. 나중에 인천시청 옆에 재판소가 있는데, 거기서 공원으로 올라와 버렸지. 어떤 미친 놈이 오지도 않은 이승만 박사가 온다고 소문을 낸거지. “(김양섭: 박상규 1922년6월30일생, 눈빛.2005.)

조선인의 치안을 유치하고자 하는 치안자치회가 결성되어 조선인의 조선독립만세 대규모 집회를 지속적으로 이끌었다. 이에 일본 경찰과 헌병은 “시민의 치안을 유지하지 못 한다”는 선언을 하였다. 이같은 일본경찰과 헌병의 조치는 일본인에게는 엄청난 충격과 공포를 가져오게 하였다. 매일 열리는 조선인의 대규모 집회는 한마디로 생경한 공포 그 자체였다. 특히 인천을 고향으로 생각하고 살았던 일본인에게는 조선인의 대규모 집회는 처음 겪는 일이어서 더욱 그러하였다. 그래서 집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고 문을 잠그고 전전긍긍하는 처지가 되었다.

“눈앞의 문제는 일본인과 조선인의 지위가 뒤비뀐 것으로 왠지 조선인들의 습격이나 박해 및 생명 재산의 안전에 대한 두려움만 존재하였다. 그것들을 보호하기 위한 총독부의 지형을 바라고 있었다.

밤이 되면 조선인들이 횃불을 거리에 모여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광희난무하는 일이 17, 18일까지 이어졌다. 그런데 일본인을 습격하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문을 잠그고 전전긍긍하였다.”(소곡익차랑: 인천인양지, 황해문화 2001.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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