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인천 키워드] 진귀한 서고, 스마트폰, 뉴스테이-2017년3월6일(월)

글쓴이: 이장열 발행인_lee@incheonpost.com

부평은 작년부터 부평을 음악도시로 만들기 위한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광복 뒤 일본군대를 대신해서 미군들이 일제가 구축한 조병창을 접수하면서 미군들의 보급부대로 주인이 바뀐다. 우리나라 영토인데도 근 100년이 지난 지금도 부평 에스컴를 거쳐 지금의 캠프마켓은 여전히 미국영토다. 우리 주권이 미치지 못하는 데가 현재 미군부대라고 보면 될 터.

1950년대부터 부평에 자리잡은 미군부대에서 흘려나오는 리듬은 부평 사람들에게 파격적이고 뭔가 정조되지 않은 자유로움이 묻어나는 그야말로 개인주의를 밑바탕에 둔 해방의 리듬으로 다가왔고, 한마디로 문화적 충격 그 자체였을 것이다.

대한민국 어느 곳보다 부평에 자리잡은 미군부대 근처에서 태어나고 자란 부평 사람들에게 미국의 대중음악을 속속드리 받아내고 느꼈을 것으로 짐작된다. 지금의 갬프마켓 주변 부평 신촌과 삼릉은 당시 1960년대까지 밤이면 미국 본토에서 듣는 음악을 라이브와 음반으로 늘 들을 수 있는 곳이고, 대중음악을 하고 싶은 당시 젊은이들은 부평 삼릉에 모여서 미군부대 안 클럽으로 밤이면 미군이 제공한 차량을 타고 파주와 의정부까지 출장을 가 연주해주고, 새벽녘에 무거운 몸을 다시 누웠다. 그리고 낮에는 옹기종기 모여서 미군들이 좋아하는 최근 대중음악을 연주하는 연습을 한 곳도 부평 삼릉이다. 그곳에는 김정호는 드럼을 연습하고 있었다.

낮이고 밤이고 미국의 대중음악을 들었던 부평 사람들에게 음악은 몸과 뼈에 그대로 녹아 들었다고 보는 것은 너무 지나친 말은 아닐 터이다.

1970년대 부평 삼릉에 있는 여중을 졸업한 감독 임순례가 제작한 와이키키 브라더스 영화가 그냥 나온 것이 아님을 짐작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부평 음악도시는 근대 부평을 지탱하는 버팀목이 미국발 대중음악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될 때 첫 단추가 끼워지는 것이다.

이런 근원적 질문과 뿌리에서 시작하지 않는다면 선무당이 사람잡는 꼴이 될 것이다. 부평의 음악도시사업은 음악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부평의 근대 역사에 중요한 근간이었던 미군들의 대중음악이 부평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고, 그 영향이 지금 부평사람들에게 어떤 모양새로 다가왔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 작업이라는 사실을 이 사업을 주관하는 이른바 자칭 문화기획자라는 사람들이 전혀 눈치도 채지 못한다면 문화철학에 대한 이해도가 천박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다.

왜 부평이 음악도시를 해야 하는지조차 모르는 이에게 또 다시 묻고 싶다. 이 사업을 왜 하는지 또 묻고 싶다.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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