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그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난감하다. 화가? 행위예술가? 시민활동가? 문화운동가? 어쩌면 모두가 맞고, 모두가 틀린 말인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는 1인 10역도 넘는 버라이어티한 인생을 살아온 까닭이다. ‘생생지락예술창작소’ 임종우 대표(56세) 이야기다. ‘인천사람 치고 임종우를 알면 빨갱이고 모르면 간첩’이라는 농담처럼, 그는 인천바닥에서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유명인사다.
폐허를 창작공간으로 조성, 예술가들 모여
그가 작년인가 재작년 말쯤, 수봉산 밑 도화동 507번지에 둥지를 틀고 다 쓰러져가는 낡은 빈집에 ‘생생지락 예술창작소’를 만들 때부터 뭔가 심상치 않은 낌새가 보이더니, 그 비좁고 낙후된 산동네를 마을주민들과 힘을 합쳐 그럴싸한 예술공간으로 탈바꿈시켜 놓았다. 허물어진 담벼락은 깔끔하게 도색이 되어 그림과 사진 등 예술작품이 내걸렸고, 버려졌던 골목계단과 삐뚤빼뚤한 길가는 예쁜 꽃들로 말끔히 단장되었다. 마을 한 가운데로는 시원스레 찻길도 뻥 뚫렸다. ‘수봉산507 골목갤러리’가 탄생한 것이다. 폐, 공가를 창작공간으로 조성해 다양한 예술가들을 불러 모아, 각종 창작프로그램과 생활예술, 인문학교실 등도 운용하고 장차 마을전체를 다목적 대안문화공간으로 만들어 갈 계획이란다.
그러고 보니 ‘생생지락(生生之樂)’이라는 문패도 의미심장하다. 고대 중국의 은나라 황제가 읊었다는 ‘낙생여사 기생야후(落生與事 其生也厚)’에서 따온 이 말은, ‘생을 즐기며 일을 하면 인생이 풍요로워진다’는 뜻이다. 그는 척박하고 낙후된 도시의 달동네에 삶의 ‘즐거움’과 ‘재미’를 전염시키기 위해 침투한 ‘문화게릴라’였던 셈이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제14회 주안미디어축제’기획단 단장으로 또 한 번 변신을 했다. 올 9월까지 한시적이긴 하지만, 그가 판을 짤 9월의 축제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축제준비로 분주한 그를 남구청에 자리한 미디어축제기획 사무실에서 만났다.
“유년시절부터 인천은 구석구석 삭막함으로 착색된 도시였어요. 전쟁의 상흔이 도시전체를 트라우마에 빠뜨렸고‘ 인천사람들의 뇌리에 오래도록 흉터로 얼룩지게 했던 거죠. 인천은 한반도의 모든 문화와 문물을 태동시킨 젖줄이면서도, 늘 서울의 ‘가방모찌’신세였어요. 걸핏하면 중앙에 양보하거나 뺏기는 게 타성이 되고 말았죠. 이제 그 지겨운 피해의식을 걷어내고 문명의 발상지이자 한반도 문화예술의 맏형역할을 되찾을 때가 왔다고 봐요.”
그는 인천의 신촌으로 불리던, 부평기지촌지역 출신이다. 아버지는 미군부대 창고관리를 하던 군무원이었고, 어머니는 미장원을 운영했다. 미장원의 주 고객들은 속칭 ‘양색시’들이었다. 덕분에 제법 넉넉한 중산층집안의 3형제 중 둘째아들로 별 어려움 모르고 자랄 수 있었단다.
“어머니는 주위환경이 신경 쓰였나 봐요. 부평서초등학교를 다니던 저를 서울수송초등학교로 전학시키셨어요. 날마다 인천에서 서울까지 통학을 했죠. 종로를 거쳐 미도파, 신세계, 남대문시장을 지나 서울역에 와 기차를 탔어요. 전동차가 다니기 전이라, 기차가 1시간 간격으로 운행하던 때였죠. 중학교 때 전동차가 생기면서 그 낭만도 함께 사라졌어요.”
배문중학교를 나와 배문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 그림에 꽂혔다. 미술반 지도교사가 하영식 선생이었는데 당시 ‘국전’의 폐쇄적 운영에 반발해 만들어진 ‘창작미협’의 중추작가였다.
“선생님을 도와, 덕수궁미술관의 그룹전과 종로의 연합전시회 같은 전시장설치작업 수발을 들면서, 까까머리 고삐리였던 제가 한국의 유명거장들과 교류하는 행운을 얻게 되었죠. 오직 그림으로 눈뜨고 그림에 미쳐 잠들던 고등학교 시절은 제 인생최고의 황금기였어요. 매일 아침조회시간은 제가 상을 받는 무대였죠. 모두들 저의 재능을 인정하고 부러워했어요.”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그 화려한 입상경력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대학에 보기 좋게 낙방했단다. 충격이었다.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던 시절이라 다른 대학은 거들떠보기도 싫었다.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작은집이 있는 평택으로 내려갔어요. 당시 평택은 젊은이들이 즐길만한 마땅한 놀이문화가 척박한 지역이었죠. 기껏 마담다방 몇 군데가 전부였어요. 마침 평택역 앞에 신축건물을 짓고 있었는데, 그곳 2층에 ‘뻐꾸기’라는 음악다방을 오픈했어요. 본가와 작은집을 설득해 창업자금을 융통했죠. 인테리어도 직접하고 서울 명동서 음악 하던 친구들도 불러 내렸어요. 미군부대 Al-Tech32 음향시설을 설치하고, 미군부대 톱밥커피, 고급 원두커피를 팔았죠. 결과는 대박이었어요. 평택의 젊은이들이 저희 음악다방으로 물밀듯 몰려들었죠. 마침 중대 안성캠퍼스 학생들이 대거 평택으로 유입된 것도 도움이 되었어요. 명절 같은 때에는 50개 테이블이 모자라 번호표를 받고 길게 줄을 서서 대기해야 겨우 입장할 정도였죠. ”
‘돈은 얼마든지 벌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돈보다 다른 욕심이 생겼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동네DJ’를 키워 지역음악문화를 넓혀야겠다는 책임감이 고개를 든 것이다. 이때부터 이미 그의 영혼 밑바닥에 잠재돼있던 ‘문화게릴라的 끼’가 눈을 뜨기 시작한건지도 모른다.
음악다방, 카페주인, 민간단체 활동 등 끝없는 변신
“평택은 물론 인근의 오산, 안양, 안성, 천안지역을 아울러 ‘경기남부 DJ컨테스트’를 열었어요. 가수 정태춘, 박은옥, 남궁옥분, 코미디언 임희춘씨 등을 심사위원으로 초청해 입상자에겐 트로피와 상금도 푸짐하게 줬죠. 대성황을 이뤘어요. 단박에 ‘뻐꾸기’가 평택 음악다방의 메카로 떠올랐죠. 여기저기서 술 도매상, 유선음악방송 등의 제의가 쏟아져 들어오기도 했어요.”
그렇게 2년을 보낸 후 음악다방을 작은집 동생에게 넘기고, 인천에 올라와 다시 대학에 도전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원하는 대학으로의 진학에는 실패했다. 하는 수 없이 후기로 인천대를 선택했다. 초등학교부터 해오던 통학이 귀찮고 싫증났기 때문이다. 인천대도 10대 1의 만만찮은 경쟁률이었단다. 83학번 늦깎이로 대학생이 된 그의 캠퍼스생활도 평범할 리 만무했다.
“미술학과에 다녔는데 재미가 하나도 없더라고요. 고등학교 때 다들 신물이 날만큼 마스터했던 소묘만 주야장창 시켰어요. 젊은 피 속에 용트림하던 예술적 끼를 마음껏 발산할 커리큘럼이 너무도 빈약했던 거죠. 참다못해 학우들을 독려해 강사수준과 커리큘럼에 문제를 제기하며 농성을 주도했어요. 인천대 최초로 ‘총장실점거사태’로까지 이어졌죠. 결국 총장님과 합의를 이끌어냈고, 진통 끝에 ‘미술학회’가 만들어졌어요. 미술학회는 다른 과에로 까지 번져, 인문대와 자연대가 연합한 ‘인천대 학회연합’이 결성되었죠.”
그가 단과대 학회장을 맡으면서 ‘학도호국단폐지’와 ‘학칙변경’을 요구하며 총학생회가 출범했고, 다시 ‘선인학원 재단문제’가 터지면서 ‘초대 민주총학’으로 확대되었다. 민주총학이 앞장 선 인천대 데모와 총장실 점거사태는 결국 인천대 시립화의 초석을 마련했고, 다음해 인천 5.3운동과 6월 항쟁으로까지 이어지는 도화선이 되었다.
“4학년 때 인천대 시립화를 주장하며 당시 인천시장님을 만나러 시청엘 갔는데, 형사들이 들이닥쳐 총학회장단 3명을 동부서로 연행해갔어요. 시장님께서 적극적으로 나서 항의하는 바람에 겨우 풀려나긴 했는데, 그 후 동네파출소장과 통장이 감시하고 날마다 전화확인을 해대는 통에 집에 들어가기가 힘들어 졌죠.”
체중미달로 병역면제판정을 받았단다. 1987년 2월 졸업을 하면서 부평에 ‘도시인’이라는 카페를 열었다. 카페와 함께 출판홍보기획사도 만들어 운영하면서 후배들의 투쟁을 지원하는 한편,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 활동을 병행했다. 카페 ‘도시인’은 경원노조, 4공단노조, 인천문화패들의 사랑방이자 아지트가 되었다.
“3년 후 카페와 기획사를 접고, 막 창간된 ‘부평신문사’ 편집차장으로 들어갔어요. 다시 ‘인천라이프신문’ 창간멤버로 자리를 옮겼죠. 인천시청 출입기자를 했는데 취재는 물론, 편집에 신문제작까지 몽땅 제 몫이었어요. 일에 과부하가 걸려 버틸 수가 없었죠. 1년 만에 사표를 쓰고 친구가 하는 강화콘도사업에 동참했어요. 하지만 관광개발사업이란 게 만만치가 않더라고요. 고생만 실컷 하고 손을 털었죠.”
부평농산물시장연합회 사무국장을 하면서는 ‘구월동농산물시장 통폐합반대운동’과 북부권농산물시장 건설필요성을 주장하며, ‘삼산동 농산물시장 유치추진위’를 만들어 관철시키는 성과를 냈다. 올해로 21회째를 맞이하는 ‘부평풍물대축제’도 그의 작품이다. 그 와중에도 창작활동과 인천지역미술운동에도 열성을 쏟아 지평, 학산, 작업동인1984 멤버들과 함께 ‘오늘의 인천형상전’ 같은 전시회도 개최하고 인천의 중진작가들이 참여하는 ‘우리문화가꾸기’에서도 활발히 활동했다.
9월 주안미디어축제 기획 구상중
“서울, 인천, 부산, 광주 등의 전국단위 ‘PC방연합회’를 만들고, 사무총장으로 ‘사단법인 한국인터넷플라자협회’ 창립에 관여하면서 ‘음비게법(음반, 비디오, 게임에 관한 벌률)’ 제정 투쟁을 이끈 경험으로, ‘씨줄정보통신’이라는 원격 플랫폼사업체를 직접 운영하며 잠시 외도를 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2013년 10회 ‘주안미디어축제’참여를 계기로 올해 14회 축제 때는 단장으로 공채되어 생활문화축제현장으로 돌아왔죠. 지금 제 머리 속은 온통 미디어축제 생각으로 발 디딜 틈이 없어요.”
▲임종우 대표의 설치미술 작품
사실 그의 인생을 수박 겉핥기식으로 짤막히 열거하는 것조차 버거울 지경이다. 분명한 건 인터뷰 내내 빙긋한 그의 미소 뒤에서 여전히 불똥 튀기며 이글대는 ‘문화게릴라의 본능’을 확인한 것이다. 기자는 문득 그의 변화무쌍한 인생여정의 끝이 궁금했다. 그는 도대체 궁극적으로 무엇을 추구하며 문화 게릴라 투쟁을 숨 가쁘게 이어오고 있는 걸까? 커피 한 모금 털어 넣고 지긋이 허공을 음미하는 그의 시선을 좇아본다. 6월의 인천하늘이 시리도록 푸르다.
글. 커피그림 : 유사랑 I-View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