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광석 기자
쾌도난마의 예술세계 정립
‘좌수서’로 새로운 경지 일궈
인연 깊은 제물포구락부에서
인천시는 서예가 검여 유희강(劍如 柳熙綱, 1911~1976) 선생 특별전시를 중구 ‘제물포구락부’에서 연다고 15일 밝혔다. ‘붓으로 세상을 베다-검여 유희강의 삶과 예술세계’라는 주제로 내달 30일까지 이어진다.
이번 전시에는 ‘세상을 거침없이 베어 나가듯’ 쾌도난마의 예술세계를 정립한, 선생의 철학과 정신이 오롯이 담긴 유묵 33점이 선보인다. 아울러 제물포구락부 홈페이지에 ‘검여 유희강 디지털 아카이브’를 마련해 온라인으로도 작품을 감상할 수 있게 했다.
검여는 인천 서구 시천동에서 태어나 1937년 명륜전문학원(현 성균관대학교) 졸업 후 중국 유학길에 올라 북경 동방문화학회에서 중국서화와 금석학 등을 배웠다. 이후 3년여 강서성(江西省)의 유수 언론에서 편집기자로 활동하다 광복 이듬해 5월 시천동 본가로 귀향했다.
1952년 동정 박세림, 우초 장인식 등과 ‘대동서화동연회(大東書畵同硏會)’를 조직하고 부회장에 선임되었다. 같은 해 동 단체 주최 제1회 서도예술전에 처음으로 서예작품을 출품했다. 1954년 제3회 국전에 서예 ‘독서운생벽(讀書雲生璧)’이 입선, 이듬해 제4회 국전에 서예 ‘칠언대련(七言對聯)’으로 특선을 수상했다.
그림에도 남다른 재능을 보였던 검여는 유화 22점을 남겼으나 40대 중반에 접어들며 오로지 서예에만 몰두했다. 1959년 제1회 개인전을 인천 은성다방에서 열었다. 이 전시에는 모두 50점의 작품이 걸렸는데, 그간 여러 서체를 편렵·연구한 것을 두루 펼쳐보였다.
1962년 5월 은성다방에서 열린 ‘5·16 1주년 기념작품전’에 참여했고, 전시 이틀째 되던 날 야간 이웃집 화재로 전시된 작품 모두가 불타버린 일화도 있다. 그 즈음 월북했던 명륜전문학교 동창생을 하룻밤 재워준 혐의(불고지죄)로 정보기관에 연행되어 고초를 겪기도 했다.
또한 월전 장우성 화백과 1년 남짓 교유하며 사군자를 비롯한 동양화 기법을 습득하기도 했다. 6순을 앞둔 1968년 절친 동양화가 배렴의 장례식에 다녀온 뒤 뇌출혈로 쓰러져 꼬박 2주 만에 깨어났다. 후유장애로 오른쪽 반신불수와 실어증을 겪었지만, 굴하지 않고 왼손으로 ‘좌수서(左手書)’라는 새로운 경지를 일궜다.
이듬해 6월, 발병 10개월 만에 제4회 한국서예가협회전에 좌수서 작품 ‘주감가경전(酒酣歌耕田)’을 출품했다. 10월 제18회 국전에 초대되어 좌수서 ‘한창여시(韓昌黎詩)’를 출품했고, 일중 김충현으로부터 “서(書)에 통한 서가(書家)의 잠꼬대의 참소리 같은 순수성이 있다”는 쓰디쓴 평가를 받았다.
1976년 대작 ‘석북시 관서악부(石北詩 關西樂府)’를 쓰기 시작했고, 글 앞머리인 제발(題跋)에 붓방아를 찧었다. 10월 16일 간송미술관 사군자전을 둘러보고 귀가, 가까이 지내던 이의 부음을 듣고 새벽 녘 못다 쓴 ‘제발’을 쓰다가 지병이 재발, 18일 오후 운명했다. 향년 65세.
사후 3년이 지나 문화공보부 문화훈장에 추서되었다. 30여 년이 흘러 검여의 뜻을 잇는 후학들의 모임 ‘시계연서회’ 주최로 인천종합문예회관 전시장에서 대규모 전시회를 가졌다. 2006년 11월 인천문화재단이 주관한 제2회 인천문화예술대표인물로 선정되어, ‘검여 유희강 서거 30주년 기념 특별전’이 열렸다.
이번 전시가 열리는 제물포구락부는 선생과 인연이 깊은 공간이다. 6.25전쟁 막바지였던 1953년 4월부터 1989년까지 우리나라 최초 공립박물관인 인천시립박물관으로 활용됐고, 1954년 검여는 석남 이경성의 후임으로 제2대 관장으로 취임해 7년여 동안 재직한 바 있다.
최정은 시 문화유산과장은 “검여 선생과 인연이 깊은 제물포구락부에서 선생의 작품을 소개하는 뜻 깊은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다”면서 “많은 인천시민들이 관람하시어 예술적 정서 함양과 인천에 대한 자긍심을 되새길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매주 월요일은 휴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