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택수의 耳目口心書’-2

손택수 시인

장청사(長靑社)
18세기 화성의 남양 바닷가 고을들은 울울창창한 소나무숲이 많았으나 염전이 늘면서 땔감용으로 산야가 머지않아 벌거숭이가 되었다. 이에 이옥은 나무를 심고 보호하는 결사를 조직하는데 손수 지은 이름이 ‘장청사’다. 매일 두 사람씩 윤번으로 산을 순찰하여 감시를 하였고 이를 게을리 하면 엄히 다스리는 금법을 만들었다. 또한 매년 4월과 10월엔 회합하여 나무 심기의 성과를 평가하였다. 그곳이 ‘대현과 방곡과 채경과 고령과 해정’이라고 하였으니 이옥의 본가가 있던 매화동 부근인 듯하다.

이옥의 정원
이옥 전집을 읽는다. 문체반정의 희생자인 이옥이 고향에 내려와서 심은 식물들은 기록만 다음과 같다. ‘소나무 오백여 그루, 떡갈나무 백여 그루, 복숭아나무 이십여 그루, 살구나무 네다섯 그루, 오얏나무 네다섯 그루, 대추나무 서너 그루, 고욤나무 네댓 그루, 모란 예닐곱 그루, 참죽나무 십여 그루, 가죽나무 대여섯 그루, 옻나무 오륙십 그루, 오동나무 한 그루, 장미 서너 뿌리, 해당화 한 그루, 무궁화 한 그루, 산당화 서너 그루, 전나무 서너 그루, 조피나무 한 그루, 산앵두나무 한 그루, 두릅나무 한 그루, 두견화 서너 뿌리, 두충나무 한 그루, 산사나무 두 그루, 석류나무 대여섯 그루’이다. 열매나 재목이 식목의 기준일 뿐만 아니라 실용주의적 잣대론 취할 만한 가치가 없는 식물들이 그의 정원을 가득 채웠던 셈이다. 심미적 인간이 우주와 만나는 방식일 것이다. 동탄의 ‘보타닉 가든’에 외롭고 쓸쓸하였으나 드높은 생명의 서사를 온몸으로 실천한 이옥의 정원을 꿈꾸어본다.

미륵불
점심을 들기 위해 사무국 직원들과 함께 반석산 무장애길을 탄다. 노작문학관과 화성문화재단 사이에 허리띠처럼 걸려 있는 둘레길이다. 그 중간쯤에 미륵불이 있다. 동탄면사무소 부근에서 현재 위치로 옮겨왔다. 몇 해 전까진 비와 바람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어서 풍화의 멋도 멋이긴 하지만 지나치게 방치된 느낌이라 지나칠 때마다 뭔가 송구스러운 생각을 지울 수 없었는데 그 사이 기둥과 지붕을 얹어 어엿한 거처가 마련되었다. 각이 들어서고 나서 사람들의 변화가 엿보인다.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바위를 보듯 데면데면하게 스치던 사람들이 공손하게 절을 하기도 하고, 설명판을 찬찬히 뜯어보며 묵상에 잠기기도 한다. 언제나 그 앞엔 생수와 과자 봉지들이 놓여 있다. 아기장수 설화와 미륵불 신앙을 품은 바위 앞에 고개를 숙일 때 그것은 신앙을 넘어 이 땅을 지켜온 얼에 대한 경배다. 그림에 액자를 끼운 것뿐인데 그림을 보는 자세와 몸가짐, 마음가짐이 달라진다. 이런 형식은 더욱 고양되어야 마땅하다.

고구마 책방
화성에서 자랑할 만한 노포를 뽑으라면 그 으뜸 순위에 먼저 월문리의 ‘고구마 책방’을 들겠다. 전국의 내로라하는 헌책 수집가들, 서지학자들이 부러 찾아오는 곳이다. 고구마를 캐듯 50만권 넘는 책들을 수집한 이곳의 책방지기는 일생을 오직 책을 사랑하는 일에 바친 기념비적 인물이다. 오랜 훈련을 통해 책을 보는 독자적인 줏대와 잣대를 갖고 있는 그에게서 나는 수집가들 특유의 장인 정신을 만난다. 그가 근대 백여 년 동안의 학교 졸업 앨범을 모아놓은 컬렉션을 보여주었을 땐 그 자체로 경이와 감동을 느끼기도 하였다. 거기엔 한국의 근대 학교사 뿐만 아니라 졸업 패션과 북디자인 그리고 제본술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잃어버린 추억의 보물상자를 만난 듯했다. 기회가 되면 졸업 앨범 전시를 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으나 반신반의 갸우뚱 한다. 사람을 잘못 채용했다가 귀중한 책들을 도난당한 이후로 그는 사람 보다 고양이를 더 신뢰하며 산다고 했다. 고양이는 책으로선 질색인 쥐라도 잡기 때문이다. (끝)

‘손택수의 耳目口心書’로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시인이 보고 듣고 느낀 짧은 글들로
팍팍한 세상살이 위안이 되길 바랍니다.
【편집자주】

‘부평위클리’ 월 5천원 후원구독자 300명 참여(클릭)

About THE BUPYEONG WEEKLY

One comment

  1. 좋은 시인의 좋은 글을 이리 만나게 되니 좋네요.
    모쪼록 시인의 이목에 든 여기저기의 풍경과 서사들이 부평위클리의 너른 뜰 안에 오롯이 펼쳐질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