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뉴스 기사 제휴에 따라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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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박흥열 강화뉴스 이사장
봉분 24기 중 16기만 위치 확인돼
2009년 향토사학자들의 조사 이후 제대로 된 조사 없어
강화군, 인천시 강화학파 봉분관리 아예 무관심
3.1만세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올해, 당시 독립운동에 매진했던 이들을 기리는 행사가 전국에서 개최되고, 강화군도 지난 3월에 다양한 행사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정작 강화군은 강화 독립투쟁의 뿌리이자 1910년대를 전후하여 만주지역 무장독립투쟁과 깊은 연관을 갖고 있는 강화의 인물과 사상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 밖이다. 게다가 남아있는 그들의 봉분 조차 전혀 관리하지 않아 이에 대한 대책이 시급하다.
‘강화학파’란 양도면 하일리에 묘지가 있는 하곡 정제두의 후손과 제자들로 이어진 양명학자들을 일컫는다. 그 중에 영조 때 관직을 버리고 강화도로 낙향한 지식인 학자가문(육진팔광)으로 불리운 이진위, 이광명, 이광사 등과 초원 이충익, 이영익, 병인양요 당시 자결한 이시원, 이지원 형제와 손자인 영재 이건창, 경재 이건승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들 강화학파 계승자들의 무덤이 현재 강화군 곳곳에 흩어져 있다. 경재 이건승이 1910년대 후반 만주에서 작성한 <가승(家乘)>에 의하면 강화학파 후손 중 전주 이씨 관련 묘지는 총 24기가 있으나 2009년 향토사학자들의 답사에 의해 총 16기가 확인된 바 있다.
지난 4월 초 본지는 봉분 관리 실태를 파악해보았다. 대상지는 화도면 사기리, 길상면 선두리, 양도면 건평리, 하일리, 내가면 외포리에 있는 강화학파들의 봉분이다.
먼저 화도면 사기리에 위치한 명미당(영재 이건창 생가)을 찾았다. 명미당 옆과 뒤로 강화학파 관련 봉분이 산재해있다. 아래 쪽은 윗대 조상인 이대성 부부 합장묘, 이시원 부부 합장묘이 있는데 비교적 잘 관리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뒤편에 있는 이광명, 이진위는 물론 이건창의 막내동생인 이건면의 묘지는 찾을 수 없을 정도이다. 묵묘에 가까운 몇기의 봉분이 누구 것인지도 알 수 없는 채로 버려진 것이다. 참의공 이광명 묘지임을 알리는 안내 입간판은 녹이 슬어 없느니만 못했다.
또한 1906년 을사늑약 이후 감리교의 교육운동과 더불어 경재 이건승이 주도하여 설립한 <계명의숙 터> 역시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게 변해버렸다.
길상면 선두리에 있는 초원 이충익의 묘지는 더욱 참담하다. 초피산 맞은 편 도로 공사 중인 산언덕에 위치한 그의 묘지는 아예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올라가는 길조차 없었다. 대략 묘지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양도면 하일리의 하곡 정제두 묘소 맞은 편에는 정제두의 선조인 정유성, 권율 장군의 형님되는 권개의 묘지는 그나마 집안에서 관리하고 있어 형편이 나아보였으나 설명이나 안내판이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양도면 건평리에 소재한 영재 이건창의 묘지 역시 10여년 전 인천시의 협조를 얻어 정비하였으나 그 옆에 있는 두 개의 봉분, 이시원과 함께 자결한 이지원과 근처에서 이장해온 이면백의 무덤은 왜소하기 그지없고 무덤의 주인이 누구라는 안내판이 전혀 없다. 건너편의 이희원 묘지는 물론 외포리에 있는 강화학파의 무덤 역시 관리가 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이다.
강화학파 당사자는 물론 그의 부인들의 묘지들도 발굴 관리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강화학파의 계승은 주로 집안의 가전으로, 혼인관계로 퍼져나갔기 때문에 강화학파와 조선 후기 실학자, 개신유학, 천주교, 성공회와의 관계, 일제시대 독립운동과의 연결성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기 때문이다.
본지가 만난 강화학파의 후손 중 이모씨는 “사비를 들여 선조들의 봉분을 관리하고있으나 역부족이다. 이대성 할아버지의 신도비를 사비로 세웠는데, 2013년 진본이 경기도 일산 건설현장에서 발견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이를 입수하여, 지금의 신도비가 세워진 자리 옆에 세우려 했으나 행정에서 말도 안되는 이유로 이를 거절하고 있어 안타깝다.”라고 했다.
강화학파의 사상과 역사를 파악하는 제대로 된 연구 작업을 당장 시작하는 것은 어렵다 하더라도 봉분을 관리하고, 최소한의 안내 입간판을 설치하여 강화학파의 흔적을 보전하는 일은 지금 당장이라도 착수할 수 있다. 예산타령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행정과 민간 차원에서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가운데 강화군의 찬란하고도 거대한 역사인문 컨텐츠가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강화학파는 그 자체로 강화의 정신을 파악하는 중요한 철학, 역사적 토대이면서,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인문학적 체험, 강화학파 나들길과 같은 관광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고, 또 심포지움, 토론회, 연구작업을 통해 국제적 교류의 유용한 매체로 활용할 여지도 많다.
인천시도 이 문제에 대해 뒷짐지고 있어서는 안된다. 강화학파를 일개 군의 문화재 정도로만 여기고, 무관심한 것은 국제도시를 지향하는 인천시의 얕은 역사인식을 드러내는 것과 다름없다. 인천의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강화학파는 인천시가 지향하는 평화적 가치, 개방성을 잘 설명하는 사상이면서, 주체적 성찰, 지행합일을 내세운 실천적 사상이기에 인천의 정신과 딱 부합한다.”고 강조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강화와 인천 시민사회 일각에서 강화학파를 재조명하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것이다. 인천시에서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후문이다. 본지는 앞으로 전문가의 자문을 얻어 강화학파의 역사와 사상을 알리는 기사를 지속적으로 보도할 예정이다.
출처 : 인터넷 강화뉴스(http://www.ganghw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