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용대 대장 김원봉

[기고]약산 김원봉의 여동생 김학봉 여사 영전에

*편집자주: 이 글은 지난 2월 23일 경남도민일보에 실렸다. 문재인 대통령이 현충일 추도사에 약산 김원봉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언급에 연일 시끌시끌하다. 특히 조선일보가 김원봉의 북한에서 행적을 문제 삼아, 기록들을 찾아내고 있다. 이 참에 약산 김원봉이 북한에서 숙청당하고 주검에 이르는 기록들이 발굴되길 바란다.  약산 김원봉의 북한행으로 그의 친인척들은 일제강점기에 이어서 광복 이후에 수립된 남한정식정부에서 큰 고초를 겪었다.  그 가운데 올해 2월 24일 세상을 버린 약산 김원봉의 막내 여동생 김학봉 여사는 가족들의 아픈 상처를 내내 간직한 이였다. 이런 사람들은 무슨 죄가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약산이 남한정식정부에서 일제강점기 항일무장투쟁의 공은 우선 인정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북한에서 행적은 좀더 면밀한 연구와 검증을 한 뒤에 시간을 두고  평가를 하는 것이 바람직한 방향이라는 생각을 가져보면서 이 글을 다시 올린다.

글쓴이: 이장열<한국 근대사의 문학탐사1>저자

THE BUPYEONGPOST POST 발행인

(2019년 2월 24일 약산 김원봉의 막내 여동생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몇 자 올립니다.)

필자는 지금은 발행되지 않는 <지역문학연구> 2호(1998년)에 ‘약산 김원봉 연구에서 바로잡아야 할 데’ 글을 써서 약산이 태어난 곳이 밀양 내이동 901번지임을 새롭게 밝혀 역사학계에 알려낸 바 있다. 1997년 여름부터 근 5개월 정도 마산에서 밀양을 여러 차례 오가며, 약산의 흔적과 기록들을 찾아냈다. 약산의 막내 여동생 김학봉 여사가 밀양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데에서 살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세 차례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고 약산의 기억들을 들을 수 있었다. 현재 홍사용문학관 관장 노릇을 하는 손택수 시인(당시 대학생)도 함께 가서 만난 기억이 새삼스럽다. 그러고 보니 김학봉 여사를 만나서 큰 오빠 약산에 대한 기억들을 육성으로 들었던 세월이 20여 년이나 흘렀다.

김학봉 여사는 약산 큰오빠를 생전에 딱 한 번 본적밖에 없었다. 1945년 광복 이후에 1946년도쯤 밀양을 찾은 큰오빠를 만난 것이 유일했다고 증언했다. 약산 큰오빠와 나이 차이가 너무나 있었다. 김학봉 여사가 당시 7세였다고 하니 그럴만했다. 오랜 세월 고향을 떠나 풍찬노숙을 하며 조국광복을 위해 무장투쟁에 앞장섰던 약산 김원봉이 고향 밀양을 찾아오니 구름 군중들이 모여 환호를 보내 준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말했다. 김학봉 여사에게 큰오빠 약산은 영웅이었다. 북한에서도 이른바 ‘김일성 저격사건’으로 약산의 주검조차 제대로 확인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일본에서 조금씩 풍문을 듣고 있었던 사정과 한국전쟁이 터지자 약산의 남동생들이 보도연맹 사건으로 대구 가는 국도에서 처형당한 아픈 일이며, 김학봉 여사의 여식들도 연좌제에 묶여 사람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는 아픈 가족사도 들었다.

남북한 비극이 낳은 가슴 아픈 이야기를 꺼내는 것조차도 힘겨워했던 김학봉 여사가 1997년 문밖으로 나서는 생초보 지역연구자에게 꺼낸 말이 귓전에 아직 생생하다. “큰오빠 무덤을 찾아서, 그 무덤 앞에서 목 놓아 울고 싶은 것이 내 마지막 소원이요.” 마지막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무심한 세월에 속절없이 가시니 마음이 먹먹해질 뿐이다.

1945년부터 밀양 부북면 제대리에 누워 있는 약산 김원봉의 부인 광복열사 박차정 여사도 그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김학봉 여사님, 저승에서는 큰오빠 약산을 자주 만나시길…. 삼가 고인의 영전에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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