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이장열 발행인
부평 삼릉 줄사택이 느닷없이 강제징용자들이 수용된 곳이라는 소리를 들은 지 몇 달 지나지 않아서, 부평 조병창(일본육군조병창)이 조선인 강제 동원의 상징이라고 당시 조병창에서 일한 사람들의 구술을 근거로 주장하고 나섰다.
지난 8월 22일 인천민주화운동센터, 민족문제연구소 인천지부, 인천시민사회단체연대는 국가보훈처 후원으로부평구청 중회의실에서 ‘일제말기의 강제동원과 부평의 조병창 사람들’을 주제로 3.1혁명 100주년 기념 ‘제5차 인천역사포럼’에서 발제자로 나선 인천대 이상의 교수(기초교육연구원 초빙교수) 은 조병창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구술을 정리해서 논문 형식을 빌어 부평 조병창이 강제 동원의 역사가 존재하는 장소라고 밝혔다.
부평 조병창이 일제강점기 강제 동원의 상징으로 되살려, 부평 조병창을 포함한 부평 삼릉 줄사택을 일제 강점기에 대표적인 강제 동원의 상징으로서 알려내는 방편으로 세계 유네스코에 등재하는 것이 목표로 설정되었다.
부평 조병창이 세계 유네스코에 등재될 깅제 동원의 역사로서 희소성과 유일성을 지니고 있는지 좀더 면밀하게 꼼꼼히 다져 봄 뒤에 유네스코 운운해도 늦지 않다.
현재, 우리 지역사 연구자들은 부평 조병창은 일본제국주의를 상징하는 군사기지로서 의미를 역사적으로 기록하고, 부평에 조병창이 세워진 이유를 밝혀내고, 조병창이 광복 전까지 얼마나 많은 무기를 생산했는지 밝혀내는 것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연구가 더 필요한 영역이다. 연구도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에서 세계 유네스코 등재를 목표로 둔 것은 순서가 바뀐 듯하다. 그래서 그 의도가 불순해 보인다.
이래저래 현재 시점에서 인천과 부평에서는 강제 징용과 강제 동원을 혼동하고 있는 듯 하다.
강제 징용은 그야말로 외부와 차단된 장소에서 수용된 형태로서 드러나는 것이다.
강제 동원은 외부와 차단된 곳이 아니라, 노동의 댓가를 지불받고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형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부평 삼릉 줄사택을 강제 징용자들이 거주한 곳이라고 언급하는 것은 사실상 주장에 불과하다.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부평 비쓰비스 공장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들이 아무튼 임금을 받고 거주한 곳이다. 부평 산곡동 영단주택도 마찬가지다. 외부와 차단된 곳이 아니라, 자유롭게 출퇴근을 한 형태이기에 그렇다.
부평 조병창도 마찬가지다. 당시 조선인이 조선총독부 법령에 따라서, 군사 시설에 동원되어서 조병창에 노동력을 제공했다. 일제강점기 군수 관련 공장에 젊은 조선인들이 징병 대신 동원되었던 데는 부평 조병창 말고도 많았다.
문제는 부평 조병창은 일제강점기에 군수시설로서 부평 사람들과 차단되어 존재한 장소였다. 그 기간도 짧았기에, 부평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부평 문화가 형성될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부평 조병창은 역사 속의 기록으로 남기면 될 범주이다.
그런 점에서, 현재 부평에 몇몇 사람들이 조병창에 집중하고 여론을 환기시키는 것이 뭔가 역사적이지 않고 억지스럽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왜냐하면 부평 지역의 문화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 시간이고 공간이기 때문이다.
부평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부평의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게 한 시기는 광복 이후의 애스컴시티(미군수지원사령부)이다. 그래서 일제강점기 조병창이 아니라, 광복 이후 부평 애스컴시티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야 역사문화적인 시선으로 부평과 부평문화가 새롭게 다가올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부평 조병창에 집중하는 것이 부평스럽지 못한 이유는 부평 문화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부평 삼릉 줄사택, 부평 조병창을 강제 징용과 강제 동원의 상징으로 몰아, 세계 유네스코에 등재하고자 하는 사람들 가운데 몇 명이나 부평 사람들이 있나 살펴봐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