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석동 도쿄시바우라 사택지

동일방직 담장 앞에 숨은 아담한 동네

만석동 도쿄시바우라 사택지
만석동 도쿄시바우라 사택지

글쓴이: 김현석

여기 그림이 한 장 있다. 손으로 대강 그린 듯 약간은 허술해 보이는 약도다. 1955<경인일보>에 실렸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동양방직 인천공장을 제외하고서는 지금은 모두 찾아보기 힘든 대상들이다. 조잡해 보이긴 해도 그림 속에는 대상들 간의 관계를 분명히 보여주려고 애쓴 흔적이 남아 있다.색깔을 칠한 곳은 가해자다. 일상적인 위험 요소를 품은 위험지대로 표시한 것이다. 그 외의 지역들은 피해자다. 불안에 떨면서 살아야 하는 장소들이다.

색칠을 한 공간에는 대한석유 야적장’, ‘대동석유 야적장’, ‘미륭 야적장이란 메모가 적혀 있다. 모두 유류(油類)를 보관하는 저장소들이다. 주변에는 피난민 주택’, ‘시바우라사택[芝浦社宅]’, ‘동방사택(東紡社宅)’, ‘대성목재 사무실’, ‘합판건조장’, ‘동방공장’, ‘창고등이 표시됐다. 유류저장소에 화재가 발생했을 때 직접적으로 피해를 볼 수 있는 곳들이다.

<경인일보>가 이 기사를 실은 이유는 국가적 기업인 동양방직과 대성목재가 피해를 볼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1955년은 판자촌 철거가 강하게 추진되고 있던 때였다. 그에 맞춰 이러한 유류 야적장도 도심지에서 하루속히 이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 달 전 부산역에서 큰 화재가 발생해 42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한 것도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동인천경찰서장도 철거의 의지를 적극적으로 표명했고, 치안국장까지 현장 시찰을 하며 관심을 보였지만 3개 유류 회사들은 이미 일제강점기에 설립 허가를 받았다며 강하게 이전을 거부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소량의 등유를 보관하는 장소로 활용됐던 곳이다.

60년 전, 유류 야적장 이전 문제가 첨예하게 대립했던 장소에 약도를 들고 찾아갔다. 대성목재 합판 건조장은 아파트 단지로 바뀌었고, 유류 야적장은 주택이나 공터, 운수 업체 등으로 변경됐다. 동양방직 인천공장만은 아직까지 자리를 뜨지 않고 남아 있다. 그리고 또 한 곳, ‘시바우라(芝浦) 사택이 여전히 모습을 감춘 채 서 있다.

시바우라 사택은 도쿄시바우라제작소[東京芝浦製作所]에서 건설한 사택이다. 다른 곳의 일제강점기 사택들과 마찬가지로 외형을 대부분 고쳐서 당시 모습을 찾기는 어렵다. 도쿄시바우라제작소는 일본 도시바(東芝, Toshiba)의 전신이다. 1939년 시바우라(芝浦) 제작소와 도쿄전기(東京電氣)가 합병해 만든 회사의 정식 명칭은 도쿄시바우라(東京芝浦) 전기주식회사였다. 이 회사는 합병하던 해인 1939, 당시 인천부 화수정 매립지를 인천부로부터 양수받아 인천공장 건설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23, 이미 공장 기계들이 테슈마루(定州丸)를 타고 인천항으로 들어왔다. 시바우라 사택은 이후에 건설됐을 것이다.

지금 이곳에 사는 주민들은 일본인 사택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으나 특별히 이름을 붙이지 않고 단순히 사택이라고 부른다. 45년 전에 이사왔다는 한 주민은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자세한 내용은 모른다고 하고, 80세는 훌쩍 넘었을 법한 할아버지는 사택들 땅 속에 기름통이 묻혔을 거라고 믿기 어려운 말을 한다. 주민들한테 일본 기업의 사택이라는 사실은 그리 크게 의미를 갖지 않는 듯 보인다. 현상변경이 그동안 꽤 많이 진행됐기 때문이기도 할 테고 외부에서 주목하는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고치지 않은 집이라고 주민이 알려준 집 한 채가 도로변에 남아 있어 이곳이 오래된 동네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어쩌면 근현대사에 큰 궤적을 남긴 동양방직 인천공장의 앞 동네로 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마을일 수도 있겠다.

[시각] 2015. 11.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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